항목 ID | GC020026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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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煌墓碑 |
영어의미역 | Grave Monument of Yun Hwa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현정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장구리에 있는 조선 중기 윤황의 묘비.
[개설]
노성면 장구리에 있는 파평윤씨 노종 5방파 중의 한 사람인 문정공(文正公) 윤황(尹煌)의 묘비로, 가계와 행적, 그가 올렸던 상소문의 내용들이 새겨져 있다. 윤황은 윤창세(尹昌世)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우계 성혼의 문인으로 글씨를 잘 썼다. 인조 때 문신으로 활약하였는데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 등과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 일로 영동으로 귀양되었다가 풀려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나는 선묘나 지키다 죽는다.”라 하고 그 뒤 일체 시국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건립경위]
1660년(현종 1)에 윤황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윤황 묘비를 세울 당시 윤황의 셋째 아들이었던 윤상거(尹商擧)는 황해도 백천부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부친의 묘비를 황해도에서 나오는 질 좋은 오석으로 세우고자 육로를 통하여 운반해 왔다고 한다.
[위치]
노성면사무소에서 좌회전하여 소곡저수지 방면으로 지방도 645호선을 타고 약 6㎞ 정도 달리면 장마루삼거리가 나온다. 장마루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약 3㎞ 정도 달리면 왼쪽으로 난 길이 보이는데, 이 길을 따라 1㎞ 정도 더 가면 장구리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입구의 윤황 묘소 앞에 묘비가 있다.
[형태]
지붕돌[가첨석]은 비신에 비해 크고 농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며, 비의 규모는 높이 222㎝, 폭 104㎝, 두께 24㎝이다. 특히 비갓은 장방형의 지붕돌로 만들어져 묘비 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웅장한 편에 속한다.
[금석문]
김상헌(金尙憲)이 찬(撰)하였으며, 아들인 윤순거(尹舜擧)가 서(書)하였고 김수항(金壽恒)이 전(篆)하였다. 전액은 ‘대사간윤공묘비명(大司諫尹公墓碑銘)’이라 하고, 비문은 ‘유명조선국가선대부사간원대사간윤공묘비명병서(有明朝鮮國嘉善大夫司諫院大司諫尹公墓碑銘幷序)’로 시작한다.
비문에는 윤황의 강직한 성품에 대해 적혀 있으며, 그가 세상을 다스리고자 뜻을 품어 여러 차례 상소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윤황이 올린 상소문과, 그 상소문에 대해 왕이 답하였던 내용들을 비명에 기록하고 남겨 그의 뜻을 전하고 있다. 이 부분을 통해 윤황의 정치적인 성향과 그가 주장하였던 척화에 대한 입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뒤이어 윤황이 죽을 때 남긴 유언과 죽은 후 노성현 북쪽 선영의 산소 뒤에 묻었다는 쓰여 있고, 정치적인 그의 모습이 아닌 장중하고 과묵하며 게으르지 않고 따스했던 모습 등을 기록하였다. 그런 다음 그의 부인인 창녕성씨의 출생부터 가계, 성품, 행적 등을 기록하였고, 윤황의 아들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현재 윤황 묘 앞에 세워져 있으며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여 판독에 어려움이 없다.
[의의와 평가]
윤황 묘비는 조선시대 일반적으로 건립되었던 묘비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크기가 웅장하고 장엄하여 색다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비명을 찬하고 전한 인물들이 김상헌, 김수항 등 당대 쟁쟁하였던 인물들이었음을 볼 때 당시 파평윤씨 집안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김상헌의 경우는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하다 청까지 끌려갔던 인물로 함께 척화를 주장하였던 윤황의 정치적 성향도 함께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