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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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陟竹西樓 |
영어공식명칭 | Jukseoru Pavilion of Samcheok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길 44[성내동 9-3] |
시대 | 고려,조선 |
집필자 | 최장순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403년 - 삼척 죽서루 중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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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 삼척 죽서루 보물 제213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삼척 죽서루 보물 변경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3년 12월 28일 - 삼척 죽서루 국보 승격 |
현 소재지 | 삼척 죽서루 -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길 44[성내동 9-3] |
성격 | 정자 |
양식 | 중층 겹처마 팔작지붕|주심포와 익공계 양식 혼재 |
정면 칸수 | 7칸 |
측면 칸수 | 2칸 |
소유자 | 대한민국 |
관리자 | 삼척시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
[정의]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
[개설]
죽서루의 이름은 누(樓) 동쪽에 죽림(竹林)이 있고 그 죽림 속에 죽장사가 있다 하여 죽서루라 하였고, 또 다른 설로는 누 동편에 죽죽선녀(竹竹仙女)의 유희소가 있었다 하여 죽서루라 불렀다고 전해 오는 정자 건물이다.
[위치]
관동팔경(關東八景)의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인 죽서루(竹西樓)는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에 자리 잡고 있다.
[변천]
창건자와 창건 연대는 미상이지만 1266년(고려 원종 7)에 동안거사(動安居士)이승휴(李承休)[1224~1300]가 안집사(安集使) 진자후(陳子候)와 같이 서루(西樓)에 올라 시를 남겨 둔 것을 보아 1266년 이전에 이미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죽서루 주변에는 고려시대에 죽장사(竹藏寺), 조선시대에 진주관(珍珠館)·응벽헌(凝碧軒)·연근당(燕謹堂)·서별당(西別堂) 등 여러 건물을 지어 놓고 선인(先人)들이 그 경관에 도취되기도 하였다. 진주관은 죽서루 북쪽에 있었다. 조선시대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객사였다. 1908년에 삼척군청으로 이용하다가 1934년에 헐어 없앴다. 응벽헌은 응벽담 위쪽 진주관의 서헌(西軒)이다. 1518년에 부사 남순종(南順宗)이 창건하였지만 1908년에 헐어 없앴다. 서별당은 연근당 아래에 있었다. 1586년에 부사 강세윤(姜世胤)[1521~?]이 창건했다가 없어진 것을 1661년 부사 허목(許穆)[1595~1682]이 다시 지어서 독서당으로 사용했다. 연근당은 죽서루 남쪽에 있다. 1442년(세종 24)에 부사 민소생(閔紹生)이 죽서루의 별관으로 창건하였으며, 대소객(大小客)의 안식처로 사용되었지만 근년까지 있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형태]
죽서루는 경치 좋은 절벽 위에 건축하기 위하여 자연 암반을 기초로 삼았다. 누하층에는 17개의 기둥이 있다. 그 가운데 9개의 기둥은 자연 암반 위에 세우고 나머지 8개의 기둥은 석초(石礎)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17개의 기둥 길이가 모두 다르다. 상층은 20개의 기둥이 세워진 7간(間)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현황]
누각 전면에 걸려 있는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제액(題額)은 1711년(숙종 37) 부사 이성조(李聖肇)의 글씨, 누 안쪽의 ‘제일계정(第一溪亭)’ 글씨는 1622년(현종 3) 부사 허목의 글씨,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1837년(헌종 3) 부사 이규헌(李奎憲)의 글씨다.
죽서루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멀리 태백준령이 한 폭의 병풍처럼 펼쳐 있고, 가까이는 근산(近山)·갈야산(葛夜山)·봉황산(鳳凰山)이 솟아 있어 누각을 에워싼 모습이 마치 삼신산(三神山)의 선경(仙境)을 느끼게 하는 경지이다. 50굽이나 휘돌아 흐른다 하여 이름이 붙은 오십천(五十川)은 누각 밑의 깎아지른 절벽에 부딪쳐 갈 길을 잃고 머뭇거리면서 응벽담(凝碧潭)이란 깊은 소(沼)를 만들어 놓았다. 응벽담은 맑기도 하지만 천길 벼랑에서 내려다보면 누구나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응벽담 속에서 노니는 고기떼 모습은 죽서루의 색다른 풍경이다. 관동팔경이 다 해안 경치를 끼고 있지만 죽서루만은 해안을 볼 수 없는 것이 특색이다. 여기에다 봄가을로 백구(白鷗)가 찾아와 노니는 모습은 이곳 풍경을 한층 더 선경이 되게 한다. 누에 올라 바라보는 오십천과 절벽의 경치, 거기에 제비같이 날 듯한 누각을 지어서 조화를 이룩한 이 경관은 조물주의 기묘한 솜씨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겠다.
예부터 시인 묵객이 이곳에 무수히 찾아와 청유(淸遊)하면서 시 한 편 남기지 않은 사람 없을 정도로 죽서루는 시문 많기로 이름이 났다. 고려충렬왕 때 이승휴를 필두로 이곡(李穀)[1298~1351]·안축(安軸)[1282~1348]·정추(鄭樞)[1333~1382]·김구용(金九容)[1338~1384]·김극기(金克己) 등과 조선시대 숙종대왕·정조대왕의 어제시를 비롯하여 하륜(河倫)[1347~1416]·이륙(李陸)[1438~1498]·심언광(沈彦光)[1487~1540]·이이(李珥)[1536~1584]·양사언(楊士彦)[1517~1584]·차운로(車雲輅)[1559~?]·정철(鄭澈)[1536~1593]·허목·신광수(申光洙)[1712~1775] 등 명인대가(名人大家)의 시문이 200여 수 남아 있어 그야말로 죽서루는 시문의 터라 할 수 있다. 특히 송강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이 죽서루를 크게 찬양하여 죽서루 광장에는 ‘송강 정철의 가사터’라는 시비가 서 있다. 삼척 죽서루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변경 지정되었다. 2023년 12월 28일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