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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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南-女性靜一堂姜氏 |
영어공식명칭 | Kang-Jeongilda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영춘 |
성별 | 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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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 1772년 |
몰년 | 1832년 |
본관 | 진주 |
초명 | 지덕(至德) |
호 | 정일당(靜一堂) |
출신지 | 충청북도 제천 |
묘지 | 홍직필(洪直弼) |
주요 저술 |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 |
[정의]
1772년(영조 48)~1832년(순조 32). 조선 후기 정조~순조대의 여성 성리학자이자 문인. 충북 제천 출생으로 일생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살았고, 사후에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선영에 묻혔는데, 그의 묘소는 성남시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가계]
정일당의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강재수(姜在洙)이고, 어머니 안동권씨는 권서응(權瑞應)의 딸이다. 아명은 지덕(至德)이며, 충청도 제천에서 태어나 20세에 충주의 선비 윤광연(尹光演)과 혼인하였다. 이때 그의 남편은 불과 14세였다. 윤광연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명직(明直), 호는 탄재(坦齋)로,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6세손인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의 제자이다.
그녀의 친가였던 진주강씨는 10대조 강희맹(姜希孟) 이래 시와 문장으로 이름난 가문이었으며, 어머니는 유명한 성리학자였던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의 동생인 권상명(權尙明)의 현손이었다. 그녀는 외가의 친척들과 교유가 많았으므로 외가쪽의 성리학적 학풍도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생애]
정일당 강씨의 친가와 시가는 다 같이 벼슬을 하던 명문의 후손이었지만, 증조부 이후에는 벼슬을 하지 못하여 가세가 기울고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하였다. 남편 윤광연은 젊은 시절에 학문을 힘쓰지 않고 생계를 위하여 상업활동을 하다가 적은 재산마저 탕진하였다. 고향에서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그들은 서울 근처로 올라와 객지생활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과천에서 남의 오두막에 살았는데, 어느 해에는 흉년이 들어 3일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적이 있었다. 자녀를 9명이나 낳았으나 모두 1년이 되기 전에 죽고 하나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였다.
후에 서울로 이사하여 남대문 밖의 약현(藥峴)[지금의 중구 중림동]에 살게 되었다. 여기서 윤광연은 서당을 열어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정일당은 삯바느질을 하였다. 정일당은 각고의 노력과 철저한 가정 관리로 상당한 저축을 하게 되어, 만년에는 어느 정도 경제적 토대를 잡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약현에서 탄원(坦園)이라는 정원이 딸린 집에서 살게 되었고, 경기도 광주부 대왕면 청계산 동쪽(지금의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에 산을 사서 3대 조상 7위의 묘를 이장하였다. 또 형제와 친척들의 혼례와 상례를 대신 치러주기도 하였다.
그녀는 바느질을 하면서 남편 윤광연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녀는 재능이 탁월한데다가 남편보다 여섯 살이나 많았으므로 학업의 성취가 항상 남편보다 앞서 나갔고 남편의 학업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윤광연은 강재 송치규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익히며 많은 노론 명사들과 교유하였고,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와도 일정한 교분이 있었다. 그는 부지런히 공부하였으나 큰 학자가 되지 못하였고 벼슬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정일당은 그에게 벼슬을 단념시키고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도록 권하였다. 윤광연은 부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녀의 격려와 충고에 의하여 학문과 인격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하였다.
정일당은 가난했던 외에도 몸이 허약하여 평생을 고생하였다. 1822년 7월에는 큰 병으로 사흘 동안 기절한 후에 소생하였는데, 이때 평생 저술한 『답문편(答問編)』, 『언행록(言行錄)』 등 수십 권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처럼 만년에 병으로 신음하던 끝에 1832년(순조 32) 9월 14일에 타계하였으니, 향년 만 61세였다. 10월 30일 광주군 대왕면 둔퇴리 청계산 동쪽[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작품]
정일당의 저술은 원래 수십 책이 있었으나, 그녀의 생시에 대부분 유실되고, 현재 남아 있는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는 남편 윤광연이 그녀의 사후 4년이 지난 1836년에 남은 시와 편지 및 잡문 등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여기에는 시 38수, 서(書) 7편, 척독(尺牘: 쪽지 편지) 82편, 서 별지(別紙) 2편, 기(記) 3편, 제발(題跋) 2편, 묘지명 3편, 행장 3편, 제문 3편, 명(銘) 5편, 잡저(雜著)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중에서 그녀의 학문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심성 수양과 도학적 경지를 읊은 시와 남편과 주고받은 척독, 별지, 기, 명 등이고, 나머지는 대개 문학적 영역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정일당은 도학(道學)뿐만 아니라 시와 문장, 그리고 글씨로도 유명하였다.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에서 문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라고 할 수 있다. 38편의 시를 대략 정리해 보면 오언절구 24편, 오언율시 4편, 칠언절구 7편, 사언시 3편으로, 대부분이 간단한 사구체의 절구 특히 오언절구들이다. 초기의 작품들은 대체로 자신의 학문과 수양에 관한 내용이 많고, 후기의 작품들은 남편을 대신하여 증답(贈答)하거나 찬양, 송축하는 시 혹은 손아래 사람들에 대한 훈계의 시들이 많다.
전체적으로 보면 정일당 시의 주제는 거의 대부분 학문에의 집념, 심성 수양, 자신과 남들에 대한 도덕적 훈계, 안빈낙도의 생활, 자연 속의 관조, 달관의 체험과 같은 도학적 문제에 집중되어 있고, 타인에 대한 사례, 칭송과 축원 등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음풍영월류에 속하는 한가한 서경시나 애증과 이별, 연모 등을 노래한 서정시는 일체 없다. 정일당의 산문 역시 문체가 질박강건하고 도학적인 취향이 있다. 척독을 포함한 서간문을 제외하면 대부분 남편을 대신하여 지은 묘문, 행장, 제문 등의 공적인 글들인데, 이러한 유의 글이 가지는 일정한 형식을 준수하면서도 진솔한 감정이 질 나타나 있다.
정일당은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서체가 매우 강건하고 단정하였다. 그것은 그녀의 부단한 연습과 강인한 심성수양에서 온 것이다. 현재 남은 글씨는 문집 부록에 판각된 8자가 전부이지만, 자획이 굳세고 바르며 순수한 고풍이 있어 부드러운 미태는 찾아보기 어렵다.
[학문과 사상]
정일당은 학문 연원은 첫째, 남편의 스승이었던 강재 송치규와 평생을 사숙하였던 임윤지당(任允摯堂)[1721~1793]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녀는 공부에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남편의 사우들에게 질의하였고, 특히 남편을 대신하여 강재에게 『중용』과 상례를 문의하기도 하였다. 남편을 강재의 문하에 보낸 것도 그녀였으므로, 그녀는 강재를 스승으로 여기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율곡-사계-우암을 잇는 노론 정통 기호학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정일당은 윤지당보다 50여년 후에 태어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녀를 몹시 흠모하였고『윤지당유고』를 자주 인용하기도 한 것으로 보아 사숙의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윤지당이 말한 “남녀의 품성은 차이가 없고, 여성도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구절은 정일당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신념이 되었다. 정일당도 임윤지당의 지론을 인용하여 “하늘이 명부(命賦)한 성품에는 애당초 남녀의 다름이 없다. 부인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태사(太姒)와 태임(太任)과 같은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면 이는 자포자기한 사람이다”고 말하여 여성들의 무한한 잠재력을 강조하였다. 윤지당이 『중용』에 주력하여 장편의 『경의(經義)』를 남긴 것과 비교해 보면 두 사람의 학문에는 매우 흡사한 점이 있다. 그러므로 정일당은 『윤지당』의 성리학을 계승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정일당은 늦은 나이에 학문을 시작하였지만 유교의 13경을 두루 읽고, 깊이 침잠하여 연구하고 암송하였다. 또한 여러 전적들을 널리 보아 고금의 역사와 정치 변동을 밝게 알았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례(周禮)』, 『이아(爾雅)』,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근사록(近思錄)』,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의 책을 탐독하였다.
그녀는 많은 독서를 통하여 폭넓은 지식을 쌓았다. 그리하여 천지, 귀신, 주역, 정전제(井田制)로부터 곤충, 초목, 경전 및 역사의 어려운 이치와 일상생활에서 의심나는 모든 것을 남편과 함께 궁리하고 토론하였다. 정일당이 가장 주력하였던 것은 『중용』이었다. 그녀는 평생토록 천지와 사람의 이치를 탐구하였고, 성품과 천명의 근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녀는 젊은 시절 『중용』 연구에 침잠하여 주자의 오묘한 뜻을 체득하였고, 특히 계신장(戒愼章)의 분석에는 일가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일당은 평생 동안 성(誠)과 경(敬)의 실천에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만년에는 성품의 본래 면모를 체득하였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그녀의 시문들 중에는 이러한 경지를 표현한 것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그녀는 곤궁한 생활 속에서 안분자족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생존이 위협받는 극한적인 자연 환경과 혈육이 전멸하는 비극 속에서도 스스로 자신의 도리를 다할 뿐, 절대자에게 의존하거나 운명을 탓하지 않고 현실에서 도피하지도 않으면서 의연하게 자기 성실을 다하고 남을 위로하는 정일당의 모습에서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자와도 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평가]
정일당의 철학이나 문학은 조선시대 여성사회에서 매우 특이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를 통하여 조선 후기 성리학의 여성계 보급과 점증하는 여성들의 학문활동 및 의식성장을 이해할 수 있다. 비록 여성들의 사회활동이나 교육과 문화에 대한 제약은 심하였지만,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학술과 문예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고, 윤지당이나 정일당처럼 높은 수준의 학문을 연구하고 수양을 위하여 실천한 사람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18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여성들의 의식성장은 이 시기에 사회 및 경제의 여러 방면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근대적 맹아의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윤지당과 정일당은 성리학의 철학적 탐구를 통하여 여성들이 본질적으로 남성과 다를 바 없으며, 학문과 수양을 통하여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강한 자아의식을 표방하였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수련한 드문 여성들이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유학자 혹은 철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성리학의 본질적 원리 안에서 남녀평등의 이념을 찾아냈고, 최고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평생을 수양하고 실천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 후기 유학사나 여성사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일당 강씨는 전통시대의 많은 질곡 속에서도, 스스로 입지를 세우고 분발하여 여성들이 품성을 계발하고 자아를 완성해간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추구한 것은 사람이 가진 무한한 잠재능력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요순과 같은 지혜와 도덕을 겸비한 성인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것은 도덕실천의 단호한 결단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그들 스스로 실천하였다. 그녀의 독실한 학문과 수양의 자세는 오늘날에도 커다란 교훈과 김동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