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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159
한자 城南-在來市場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승갑

[정의]

전통사회 때부터 열려왔던 성남시의 시장.

[개관]

전통사회 성남 일대의 상권에 대하여는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근거하여 대략적인 내용을 추정할 수 있는데, 판교동에서 매월 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의 월 6회 개시하는 낙생장이 유일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송파장을 나타내는 지도에 따르면, 낙생장은 1, 6일, 성내장은 2, 7일, 판교장은 3, 8일, 과천장은 4, 9일, 송파장은 5, 10일장으로 나타난다. 특히 안양장과 경안장은 3, 8일장으로 판교장과 겹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근 지역에서 장날이 겹치는 것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장권의 구역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판교동과 인접한 낙생장에서 출발한 상인들은 남한산성 근처의 성내장으로 갔고, 다음에는 판교장을 거쳐 과천장으로 간 다음 송파장에 이르렀을 것이다. 1976년에는 고등동대왕장, 판교동판교장, 분당동분당장이 개설되고 있었으나 모란장은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재래시장의 종류와 분포]

5일장이란 5일마다 한 번씩 시장을 여는 재래 장터로, 농민 수공업자를 비롯한 직접 생산자가 일정한 날짜와 장소에서 서로 물품을 교환하는 농촌의 정기시를 지칭한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5일장은 조선시대에 나타났다.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는 임진왜란을 경과하면서 그 수가 증가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 10일장이었던 장시가 대부분 5일장으로 바뀌어, 전국의 장시는 한 달에 여섯 번 열리는 5일장 체제로 단일화되었다.

5일장은 군마다 보통 3개소에서 4~5개소로 서로 다른 날짜에 번갈아 열렸으므로 그 지방 주민들은 한 달에 18회 이상 장을 볼 수 있는 셈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5일장은 지역 사람들에게 상설 시장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5일장 체계의 형성은 적어도 한 군의 범위에서 교환이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하나의 지역적 시장권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5일장은 이후 20세기 말까지 꾸준한 생명력을 가지고 자생해왔으나 지금은 도시화와 산업화에 밀려 거의 옛 모습을 상실한 체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18세기 상업적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으로 장에 나오는 상품의 종류와 수량이 확대되고, 5일장 상호간의 경제적 유대 범위가 종전에 비해 확대되었다. 몇 개 고을을 묶는 시장권이 형성되고 일부 장시는 지역적 시장권을 벗어나 전국적 범위로 장권을 확대해나갔다.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 의하면 전국의 장시는 평안도 134, 함경도 28, 황해도 82, 강원도 68, 경기 101, 충청도 157, 전라도 216, 경상도 278개소로 모두 1,064개소에 달했다.

장시의 개설이 지역적으로 확산된 시기는 대개 18세기 초엽이나 장시의 양적, 질적 변화 과정은 모두 일률적이지 않고 각기 주변 읍의 사회 경제적 조건이나 입지 조건 등에 기초했다. 예컨대, 경상도 지역의 경우 대읍에서는 오히려 장시 수가 감소하고 중소의 읍에서는 증가하며 작은 읍에서는 별다른 증감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읍에서 장시의 수가 감소한 것은 1830년대에 대규모 장이 형성되면서 주변 장을 흡수했기 때문이고, 중소 읍에서 장시가 증가한 것은 신설되는 장시가 시장권 형성 내지 지역 내, 지역 간 연결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장의 연계 관계가 성립되고 큰 장이 형성되어 전국적 유통망을 연결하는 상업 중심지로 대두되었다. 경기도 광주의 사평장(沙坪場)과 송파장, 안성의 읍내장, 교하(交河)의 공릉장(恭陵場), 충청도의 은진 강경장, 직산의 덕평장(德坪場), 전라도 전주 읍내장, 남원 읍내장, 경상도 창원의 마산포장, 강원도 평창의 대화장(大化場), 황해도 토산(兎山) 비천장(飛川場), 황주 읍내장, 봉산 은파장(銀坡場), 평안도 박천의 진두장(津頭場), 함경도 덕원의 원산장 등이 바로 그 전국적 장시로, 이 가운데 원산장, 마산장, 강경장이 가장 크고 유명했다.

[재래시장의 상품들]

조선시대 육의전은 선전(縇廛: 비단), 면포전(綿布廛: 무명), 면주전(綿紬廛: 명주), 지전(紙廛: 종이), 저포전(苧布廛: 모시, 베), 어물전(魚物廛: 생선) 등 6가지의 대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금난전권(禁亂廛權: 난전, 즉 밀거래를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궁중, 관부의 수요품과 중국의 진헌품 조달을 부담하였다. 반면에 향시를 무대로 크게 활약한 상인인 보상(褓商: 보따리장수)은 주단포목(紬緞布木), 관구(冠具), 일용품 등을 보자기에 싸서 메고 소매하였다. 부상(負商: 등짐장수)은 도자기, 칠기, 철물, 건어물, 일용품 등을 지게에 짊어지고 각 장날을 찾아다니던 장수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전통적인 재래시장은 봉건적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이 체계적으로 교환 거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남의 경우 판교장은 5일장으로 인근 주민들의 생필품을 교환하는 유통 중심지였다. 주변의 분당장대왕장이 개설되어 유통망을 형성하면서 판교는 경제적 구심점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17세기 이후 경기 지역에서도 상업적 농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울 근교인 왕십리의 무, 청파의 미나리, 이태원의 토란, 석교의 가지, 오이, 수박 등이 상업적 목적으로 재배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수원에서 미나리와 채소가 집중 재배되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판교 지역에 섰던 조선시대 낙생장의 거래 품목은 이와 유사한 상품이 주류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남 주변의 경우, 상등답을 제외한 대개의 전답은 곡물보다는 원예 작물을 재배하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여기서 생산한 생산물은 대부분 서울로 반출되어 매매되었는데, 주요한 판로 시장은 청량리시장, 동대문시장, 왕십리 중앙시장 등이었다. 1976년 성남의 정기시장의 현황에 따르면 판교장이 주변의 고등장분당장을 규모면에서 앞지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근접한 분당장의 경우 고정 상인 15명, 이동 상인 30명, 일반 이용자 180명으로 집계된다. 반면에 판교장은 5, 10일장으로 고정 상인이 20명, 이동 상인이 40명, 일반 이용자들이 300명으로 나타난다. 가축을 제외한 1일 거래액도분당장이 65만원인 반면에 판교장 124만원에 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판교장은 1970년대까지 주변의 경제적 구심점을 담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란장의 경우 정기시장으로 성장하면서 밀도살된 가축육, 애완견, 가금류 등 축산물과 김장철의 고추, 배추 등 특화 상품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런 상황을 유추해보면 판교 너더리시장의 경우 쌀, 보리 등 곡식과 생활 필수품, 채소 등의 특화 상품이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변의 시장에서 유통되는 공통된 공산품이나 생활 필수품을 주로 구입하고 반면에 농산품을 파는 형태를 유지한 것으로 이해된다.

[재래시장과 성남인의 삶]

전통사회에서 상업은 장시를 통해 시현되었는데 그 기능은 물화 유통에 초점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시권은 도로망이나 주변 지역의 생산 기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쇠락을 거듭한 것이다. 판교를 축으로 조선 후기 장시망을 살펴보면 사평장, 송파장, 광주 성내장, 경안장, 용인 현내장, 군포천장이 둥근 원형으로 분포하여 형성되었다.

특히 송파장은 강원도와 충청도, 경상도의 특산물이 집결되는 곳이었다. '임금님께 진상하는 꿀단지도 송파를 거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서울의 상업적 관문이었으며, 18세기 중엽에는 서울시전 상인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만큼 번창했다. 판교마을의 낙생장은 주변의 시장과 유통하면서 상호 견제 기능을 유지하면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분당구 판교동에 위치했던 낙생장은 19세기 후반에 쇠락하여 소멸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분당장이 대신한 것으로 이해된다. 1905년 일제가 조사한 『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에 따르면 광주 지역 시장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광주에서 대표적으로 조사된 시장은 송파진장과 경안장이다. 특히 송파진장은 5일 10일장으로 중개인이 많고 객주가 45호에 달하며 소금과 어류를 취급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측면을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송파진장이 왕성해지면 판교마을의 장권은 위축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일제강점기의 판교 장권은 송파시장의 상권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송파시장의 경우 축산의 매매가 성행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상권의 범주에 있던 판교시장은 가축의 매매가 일정 부분 발달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동대문시장에 가축시장이 출현하면서 송파장과 동대문장이 겹치게 되자 조합비를 이유로 상인들이 동대문 시장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송파시장은 쇠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건으로 인해 광주지역의 상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러한 것은 분당장과 판교 지역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일제강점기에는 2, 7장인 분당장이 나타나며, 해방 후에는 기존의 판교시장 및 분당장 외에 고등장과 4, 9일에 개시하는 모란장이 신설되었다.

[총합적 의의]

1960년 모란장이 신설되고 광주대단지 이주민들로 인해 대규모로 발전하면서 판교시장은 상대적으로 쇠퇴하였다. 판교시장의 쇠락은 아마도 교통망의 변화로 판교를 경유하는 유동 인구의 이입이 변화된 것과 관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남의 재래시장은 유통 구조의 변화와 생활양식의 다양성으로 인해 일정 부분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전통의 민속성에서 나타나는 민족 고유적 양식을 현대 사회의 문화에 접목시켜 다양화와 현대화가 발전과 존속의 토대로 작용할 것이다.

[현황]

오늘날 재래시장의 개념은 예전부터 있어 오던 시장을 백화점 등의 현대적 시설의 판매 장소와 구분하여 사용된다. 성남시에는 1960년에 5일장인 모란장이 신설된 이후, 1970년에 상설 시장인 성호시장이 개설되었으며, 1971년 중앙시장, 1973년 현대시장, 1974년 모란시장, 상대원시장, 1977년 신흥시장, 1986년 은행시장, 1992년 하대원시장, 1993년 단대마트시장, 1994년 금광시장, 1996년 돌고래시장, 코끼리시장 등이 차례로 개설되었다.

한편 1993년 서울시 도봉구 창동에 개점한 E마트를 시작으로 1996년 유통시장의 전면 개방을 통해 다국적 유통업체들이 국내 시장에 진입하면서 전통적 재래시장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2004년 10월 22일 재래시장의 시설 및 경영 현대화를 촉진하여 유통 산업의 균형 있는 성장을 도모함으로써 지역 경제의 활성화와 국민 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재래시장 육성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 한시적 특별법은 재래시장의 종류를 등록시장과 인정시장으로 구분하면서, 유통산업발전법 제8조의 규정에 의하여 대규모 점포로 등록된 시장을 등록시장으로, 등록시장과 같은 기능을 행하고 있으나 유통산업발전법에 의한 대규모 점포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곳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기준에 적합하다고 시장·군수·구청장(자치구의 구청장)이 인정한 곳을 인정시장으로 구분하고 있다.

성남시의 등록시장은 매장 면적 3,000㎡ 이상인 현대시장, 신흥시장, 금광시장, 단대시장, 모란시장, 돌고래시장, 코끼리시장 등 7개로 모두 건물형 시장이다. 성남시장이 인정한 재래시장, 즉 인정시장은 중앙시장과 하대원시장 등 2개 시장이고, 성호시장모란민속 5일장, 상대원시장은 무등록 시장이다.

성남시는 유통 산업 전면 개방 및 전자 상거래 등 신산업 발달과 소비자의 구매 패턴 변화로 인한 재래시장의 급격한 경쟁력 약화와 대형 유통점의 점포 확장으로 유통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중소 상인, 재래시장의 영세 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활성화 방안으로 2006년 7월부터 성남사랑상품권을 제작하여 고객을 유치에 도움을 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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