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2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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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險川戰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은경 |
[정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낙생면 소재 험천에서 벌인 전투.
[개설]
험천은 현재 분당구 구미동에서 탄천에 합류한 동막천을 말하는데, 예로부터 기우단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당시 약 12만명의 청 태종의 군대가 침략하자, 충청감사 정세규(鄭世䂓)가 임금을 구하기 위해 수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청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경과]
당시 적군의 대규모 군세에 밀려 인조는 쫓기는 듯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으나, 뒤따라 쳐들어온 청군에게 산성 주변이 포위당하고 말았다. 이때 근왕(勤王 :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함) 명령을 받은 충청감사 정세규는 제일 먼저 거병하여 충청병사 이의배 선봉의 8천여 병력(혹은 1천여명이라고도 함)을 이끌고, 천안과 수원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12월 29일 남한산성 서남쪽 40여리 부근인 험천에 이르렀을 때, 근왕병을 기다리던 청나라 좌익군 제3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이때 놀란 병사 이의배는 도망가고 이성현감 김홍익, 남포현감 이경징, 공주영장 최진립은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하였으며, 아군은 크게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정세규는 말에서 굴러 떨어졌으나(또는 자결을 기도하여 뛰어 내렸다고도 함), 부하에게 겨우 구출되어 수원으로 퇴각하였다.
[의의 및 평가]
병자호란 이듬해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은 『해사록(海槎錄)』에서 “이 험천전투의 패배로 수천명의 충청도 근왕병 시체가 험천에 쌓이고 그 피가 수십리에 잇달아서 말이 나아가지 못할 참혹한 광경이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회고하였다. 이 험천전투는 인조의 위급함을 알고 맨 먼저 거병하여 진군하던 충청도 근왕병을 적군이 유격대로 아군 선봉대를 견제하면서 뒤로부터 기습함으로써 아군이 참패한 뼈아픈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