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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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정치·경제·사회/과학 기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용호 |
[정의]
고려 말 조선 초 서산 출신의 문신이자 천문학자.
[개설]
유방택[류방택, 柳方澤][1320~1402]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천문 지리에 밝았다. 그가 만든 역서(曆書)는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던 중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부름을 받아 천문 지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 제작에 참여하였다. 유방택은 이 작업에서 별을 일일이 확인하고 거리를 계산하는 등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유방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0년 그의 고향인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에 류방택 천문기상과학관이 문을 열었다.
[별을 사랑한 소년, 유방택]
최근 서해안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는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 벌천포 해수욕장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예전 같으면 당일로 해수욕을 즐기고 떠났겠지만 지금은 캠핑장과 숙박 시설이 생겨 하룻밤 묵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낭만을 꿈꾸며 밤바다의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건너편으로 보이는 공장의 조명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 고개만 들면 바라보이는 밤하늘의 별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몇이나 될까? 밤늦도록 소란스러운 가운데, 깊고 넓은 밤하늘 어딘가에는 우리와 같은 생명체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별은 꿈을 꾸게 하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게 하며 시와 음악, 그림 등 예술 활동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별은 그렇게 무한한 상상 지대이다. 광활한 우주 공간 속에는 ‘류방택 별’도 발짝이고 있을 것이다.
고려 후기, 나라가 안팎으로 어지럽던 시절 서산에 별을 좋아하는 소년이 살았다. 소년은 명망 있는 집안의 도련님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유학의 경서(經書)와 시서(詩書)에 능했다. 소년이 좋아한 또 한 가지는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는 일이었다. 소년은 관찰을 통해 계절에 따라 별들이 자리를 이동하거나 보이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중에는 항상 같은 자리에서 빛을 내는 별도 있었다.
소년은 별에 대해서 잘 아는 나이든 행랑아범에게 그 별에 대해 묻자 하인은 이렇게 답하였다. “도련님, 그것은 천극(天極) 혹은 극성(極聖)이라고 부르는 별입니다. 밤하늘에서 가장 크고, 밝은 빛을 내지요. 다른 별들과 달리 항상 같은 자리에 있기에 사람들은 ‘임금님의 별’이라고 부른답니다. 제가 소싯적 나루터에서 짐을 나를 때 원나라 상선이 들어오곤 하였지요. 선원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은 한 번 바다로 나가면 몇 날 며칠을 배에서 지내는데, 낮에는 해를 보고 방향을 잡지만 밤이 되면 저 ‘천극’에 의지해서 방향을 잡는다고 하였습니다. 뭍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있듯이 바다에서는 ‘천극’이 임금이라고 하더군요.”
소년은 하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할아범, 얼마 전 내가 아팠을 때 어머니께서 물을 떠 놓고 낫게 해 달라고 치성을 드린 별도 임금님 별이라고 했어. 뭍에서나 바다에서나 항상 사람들을 지켜 주는 저 별 말이야…….” 이후 소년은 밤하늘의 별들이 제각기 이름을 갖고 있고, 그 별에는 계절의 순환과 인간사의 이치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유방택이 실제로 어린 시절에 별을 사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서산 지역은 예부터 선진 문물의 수입 창구로서 뱃사람이 많이 살았다. 고려 시대에는 조창의 하나인 영풍창(永豊倉)이 있었고 삼남 지방의 세곡을 실은 배들이 도읍지인 개성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이런 고장에서 성장한 류방택에게 밤하늘의 별은 낯선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유방택이 태어나고 자란 구치산 양리촌, 즉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일대는 현재 담수호인 간월호와 부남호가 동서로 감싸고 있다. 하지만 고려 때는 양쪽으로 바닷물이 가까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위와 같은 에피소드를 하나쯤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밤마다 어부들이 의지하던 별과 같이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존재이고자 했던 유방택은 개혁 군주인 공민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1352년 32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처음 발을 내딛었다.
[한반도의 밤하늘을 그리다]
고려 말의 혼란은 정치력 부재로 인한 권문세족의 전횡 외에 외적의 침입 탓도 컸다. 유방택이 출사할 무렵 지배층의 횡포가 극에 달하였고 남쪽에서는 왜구가, 북쪽에서는 홍건적이 쳐들어와 백성을 유린하였다. 1357년(공민왕 6)에는 홍건적이 개성을 점령하여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이 무렵 고려에는 제대로 된 국력(國曆)[달력]이 없어 적을 진압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유방택이 만든 책력[일 년 동안의 월일, 해와 달의 운행, 월식과 일식, 절기, 특별한 기상 변동 따위를 날의 순서에 따라 적은 책]를 강화병마사에게 주어 활용하게 하였다. 이 책력은 매우 정확하여 전쟁이 끝난 후 유방택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나라가 안정된 뒤 유방택은 낙향하여 얼마쯤 고향에 머무르다가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1369년(공민왕 18)에는 과거에 장원 급제를 하였다. 유방택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여 더욱 실력을 인정받았고, 그 결과 벼슬도 점차 높아졌다.
그러한 유방택[류방택]도 휘몰아치는 역사의 소용돌이는 피해갈 수 없었다. 고려 왕조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이에 그는 망설임 없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려의 신하로서 생을 마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유방택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유방택의 능력을 알아본 태조는 새 왕조를 연 일이 ‘천명(天命)’에 의한 것임을 알리기 위해 새로운 천문도(天文圖)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천문에 능통한 유방택이 이 일의 적임자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스러진 고려 왕조와 함께 하고자 했던 유방택은 뜻밖에도 태조의 부름에 응하였다. 1395년(태조 4)에 유방택은 권근(權近)[1352~1409], 설장수(楔長壽)[1341~1399]와 함께 천문도를 완성하여 각석에 새겨 넣는 일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것이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이다. 이 천문도의 기본은 고구려 시대에 평양의 밤하늘을 중심으로 제작된 각석의 탁본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렀고, 하늘을 관측하는 지점이 한양으로 바뀌어 보완 작업이 불가피하였다.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역법이 전해졌으나 이 역시 관측 위치가 달라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지 않았다.
유방택은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새겨진 1,464개의 별을 일일이 확인하여 계산하는 복잡하고 전문적인 일을 맡았다. 각석에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奉敎] 권근은 글을 짓고[記], 유방택은 천문 계산을 하였으며[推算], 설장수는 글씨를 썼다[書]…….”고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천문을 확인하는 작업을 유방택이 담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초 천문·과학 기술의 정수로 꼽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을 완성한 후 유방택은 개국 일등 공신에 책봉되는 것을 거절하고 옛 왕조의 도읍 이었던 개성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렇다면 유방택은 왜 고려에 대한 충심을 간직한 채로 조선 왕조에 협조하였을까? 그가 말년에 개경에서 은둔한 것으로 미루어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 데 협조하거나 기여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몇몇 학자들이 유방택을 ‘반골(反骨) 천문학자’로 평가할 정도로 그는 철저하게 고려의 충신이었다.
마음은 고려의 신하지만 새로운 천문도 제작에 참여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유방택은 고려든 조선이든 묵묵히 농사를 지으면서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이 편안하고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기 때문이다. 천문도의 제작은 책력을 새롭게 정리하는 작업과 관련이 있다. 책력에는 절기의 변화가 정확히 나타나 있어 씨 뿌리고 김매고, 추수하는 시기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당시에는 나라 안팎의 혼란으로 제대로 된 책력 하나 없었기에 천문학자였던 유방택은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조정과 대신들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백성에게 진 빚을 그렇게라도 갚고자 하였던 것은 아닐까?
[고려의 충신, 밤하늘의 별이 되다]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은 1985년 8월 9일 국보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근래까지도 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유방택의 이름 석 자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최근 들어 조상들이 이룩한 과학 기술의 업적을 되살리는 작업과 함께 천문학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유방택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후손들도 사단법인 류방택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유방택[류방택] 알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국천문연구원에서도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의 과학성과 정밀성을 검토하고 천문학자 유방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 12월 6일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정강리에 있는 한국천문연구원 보현산 천문대에서 지름 1.8m짜리 반사 망원경을 통해 새로운 소행성을 발견하였다. 이 별에는 ‘류방택 XC44’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것은 국제천문연맹[IAU] 소행성센터의 승인을 얻어 지구촌 사람들이 부르는 공식 명칭이다. 우리나라 천문학 발전에 공헌한 유방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헌정된 것이다.
서산시에서는 2010년 9월 1일 유방택의 위패가 모셔진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송곡서원 옆에 류방택 천문기상과학관을 개관하였다. 류방택 천문기상과학관에서는 유방택의 업적을 기리고, 우리 역사 속의 천문과 기상, 그에 따른 백성들의 생활 모습을 전시와 설명으로 보여 주고 있으며 체험관도 꾸며 놓았다. 천체 망원경을 통해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을 볼 수도 있다. 망원경으로 신비로운 별을 감상하면서 제2의 유방택을 꿈꾸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류방택 천문기상과학관을 방문해 보자. 백성을 위한 유방택의 어진 마음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뿐만 아니라 한층 높아진 자신의 꿈도 마주볼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5월에는 서산 중앙호수공원에서 류방택 별축제도 열렸다.
지금도 서산의 밤하늘에는 많은 별이 뜬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어느 지역에서나 반짝거리는 별들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깃불이 환한 도심이나 공단 지역에서는 별을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달라진 것은 류방택 별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유방택이 백성을 위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하늘 지도를 만든 지 600여 년, 한반도의 하늘을 넘어 세계의 밤하늘에 그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 자신이 영원히 고려의 신하로 남기를 원했던 것처럼 항상 그 자리에서, 온 세상 사람들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고려의 충신 유방택은 그토록 사랑했던 밤하늘의 별이 되어 우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