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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432
한자 開港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지수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6년연표보기 - 강화도 조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68년연표보기 - 무진박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동학 농민 운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10월 28일연표보기 - 홍주성 전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4년 - 군면 폐합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역사.

[개설]

1876년(고종 13)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 이후 서산 일대에도 예외 없이 개화의 물결이 들이닥쳤다. 당시 국가 권력의 해체 과정에서 관료들의 수탈과 약탈이 횡행했는가 하면, 대외 무역의 확대에 힘입어 만석꾼으로 성장한 부호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였다. 이른바 시대 변화에 편승하여 경제력과 권력을 거머쥔 새로운 주도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에 대부분의 서산 사람들은 개항 전후 시기 부패하고 무능한 양반들의 억압과 수탈은 물론, 동학과 천주교 등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복합적으로 전개 된 격동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사회]

서산 지역은 근대 이행기 주변부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동 과정에서 대단히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천주교와 더불어 동학의 교세가 상당했는데, 이들은 모두 ‘새로운 세상’을 꿈꾼 이들이었다. 서산 지역에서는 1868년(고종 5) 무진박해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희생되었고,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 때는 많은 동학교도들이 일어났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 이전 시기부터 서산·태안 지역에는 많은 동학교도가 분포해 있었다. 당시 서산·태안 지역의 농민군은 전라도 지역[남접]의 농민군이 주도한 1차 봉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이른바 북접 교단의 기포령이 내려지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산·태안 지역의 농민군은 다른 지역과 달리 작두로 군수를 처단하는 단호함을 보이기도 했으며, 이후로 목소 전투, 승전목 전투, 예산산성 전투, 홍주성 전투, 해미성 전투, 매현 전투 등을 치렀다. 1894년 10월 28일부터 이틀간 전개된 홍주성 전투는 공주 우금치 전투에 버금가는 큰 전투였다. 하지만 내포 지역 동학 농민 운동은 해미성 전투와 매현 전투 등을 끝으로 결국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산업]

개항기 서산 지역의 새로운 산업은 제염업이었다. 당시 서산 일대 바다에서 생산된 소금은 충청도 전체 소비량의 70%를 선점 하였을 뿐 아니라 뱃길을 이용하여 한양으로도 유통되었다. 일제 강점기 서산 지역의 만석꾼들의 상당수가 소금을 굽거나 판매하여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었다. 제염업으로 돈을 번 부호들은 주변 지역의 농지를 구입하거나 갯벌을 막아 소유 토지를 넓히는 과정에서 만석꾼으로 성장하였다. 요즘처럼 값싼 ‘기계염’이 보급되기 전까지 소금 한가마니의 값은 쌀의 양과 대등하였다고 한다.

[교육]

1908년 서산, 태안, 해미 지역에는 6개의 교육 기관이 있었으며 학생 수는 대략 165명 정도였다. 서산 지역의 근대화는 이 같은 근대 학교들을 매개로 진전되었다. 1906년 안면도에 설립된 광영학교(廣英學校)를 비롯하여 서산 읍내의 풍전신숙(豊田新塾)서령학교(瑞寧學校), 해미의 해명학교와 전암학교, 태안의 화양학교 등은 대부분 지역 유지들의 후원에 기초하여 운영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 학교를 졸업한 인물들은 이후 서산 지역의 반외세, 반봉건 운동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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