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321 |
---|---|
한자 | 壬辰倭亂 |
이칭/별칭 | 임란,왜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우석 |
[정의]
조선 선조 때 경기도 시흥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두 차례에 걸쳐 발생했던 일본의 침략 전쟁.
[개설]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두 차례에 걸쳐서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은 1차의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의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를 포함하여 말한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 중기의 양반 관료제 사회는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의 격화로 지배 체제의 분열과 해이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16세기의 사림 정치는 성리학적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와 대외 정책에 있어 효과정인 정책을 실시할 수 없었으며 당쟁의 격화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국방력이 점차 약회되었다. 이를 염려한 이이(李珥)는 개혁을 단행하여 돌파구를 마련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하고, 남쪽과 북쪽 오랑캐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국가 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등장하여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통일을 이루어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의 통일과 안정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에 수차례 사신을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여러 차례 논란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보빙(報聘)[답례로 외국을 방문함.]을 겸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저의도 탐지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1590년(선조 23) 3월 서울을 출발하여 1591년(선조 24) 3월 서울에 돌아왔는데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의 보고가 서로 달랐다. 정사는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한 반면, 부사는 침입할 낌새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상반된 보고를 받은 조정대신들 사이에는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사의 말이 맞는다는 사람도 많았다.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후자의 의견에 머물게 되어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592년(선조 25) 4월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부산포를 공격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경과]
광교산을 중심으로 수원, 용인, 시흥 지방의 전투는 임진왜란 초인 임진 6월과 이듬해인 계사 2월을 전후한 시기에 두 차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1592년(선조 25) 6월 초의 광교산·문소산 전투는 삼도[전라·충청·경상]의 근왕병(勤王兵) 약 5만 명의 병력이 이곳 수원·용인 지역에서 일본군과 조우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대병력의 조선 관군은 지휘관의 작전 실패로 6월 5일 용인현 북방 문소산 전투에 이어 다음날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삼도 근왕병이 소수의 왜군에게 허무하게 무너지자, 당시 최대 과제인 한양 수복은 어려워졌다.
1592년(선조 25) 6월 초 광교산 부근 전투에서 간신히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하여 뒷일을 계획한 권율(權慄)은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그해 12월 4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상,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 주둔하며 명군과 호응하여 한양 수복을 위한 준비 태세를 강화하였다. 이때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후방과의 연락 및 보급선 두절을 우려하여 3만여 명의 대병력을 수원 지방에 파견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오산 일대에 진을 치고 주위를 포위하며 독성산성에 주둔한 조선의 군사[관군과 의병 연합군]를 유인, 공격하려 하였다. 독성산성 밑에는 날마다 싸우지 않을 때가 없었고, 권율 휘하의 조선군이 적병의 포위 속에서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전라도사(全羅都事) 최철견(崔鐵堅), 의병장 변사정(邊士貞)·임희진(任希進) 등이 이끄는 군관과 의병의 지원 병력이 이동해 왔다. 적은 대병력이 지원을 온 것으로 오인하여 성책 가까이에는 나타나지 못하고 수원을 차단하여 성중 고립을 꾀하는 장기적인 포위 작전을 펼쳤다. 조선의 군사들은 밤을 틈타 검은 옷을 입고 적병을 공격하거나 소병력 단위의 기습 작전을 펼쳐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적 진영으로 흐르는 시냇물에 오물을 뿌리고 지속적인 심리전을 펼쳤다. 일본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철병하고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결과]
전쟁이 끝난 후인 1601년(선조 34) 조정의 대신은 전쟁 후에 인구가 1/10로 줄었다고 보고하였다. 또 왜란 중에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1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편 한양이 수복된 이후인 1593년(선조 26) 6월 당시 조선은 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었다. 328개의 행정구역 가운데 무려 55.2%인 181개의 행정구역이 피해 지역으로 나타났다. 특히 경기도는 37개 읍 가운데 35개 읍[94.6%], 경상도는 67개 읍 가운데 48개 읍[71.6%]이 피해를 보게 되어 이 지역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 심하였다.
농토의 피해는 더욱 심각하였다. 임진왜란 직전에 150여 만 결(結)이던 전국의 농지 면적이 전란 후에는 30여 만 결로 급격히 감소되었다. 경기 지역에서는 강화, 교동을 제외하고 대부분 지역이 일본군에게 피해를 입었다. 이 가운데 지금의 시흥시를 포함한 지역도 피해가 컸다. 시흥 지역은 바다와 인접한 지역인 만큼 충청·전라·경상 등 삼남으로부터 조달되는 군량미의 중요 수송 루트였으며 안산과 한양 일대를 수비하기 위한 중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안산 및 인천 일대는 일본군에 의해 날마다 분탕질을 당하는 형편이었다. 이 때문에 선조도 평양에 행차하여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에게 남양, 인천, 안산, 금천 등 경기 일대의 왜적을 격퇴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시흥시에 해당하는 안산은 예로부터 땅이 기름지고 어염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 왔으나,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는 농업이나 어장의 운용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일정 기간 농업 및 어업 생산은 그대로 정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