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364
한자 秀巖岩面三一運動
영어공식명칭 Suam-myeon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이칭/별칭 비석거리 만세운동,비립동 만세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병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30일 - 수암면 3.1운동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19년 4월연표보기 - 수암면 3.1운동 주모자 체포, 투옥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29일연표보기 - 수암면 일대에 만세운동을 알리는 격문 배포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5년 3월 1일 - 시흥시 3.1운동 기념비 건립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윤병소|홍순칠|유익수|윤동욱|김병권|이봉문

[정의]

경기도 시흥시 지역이 속해 있던 옛 시흥군 수암면에서 1919년 3월에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

[개설]

수암면 3.1운동은 일제에 맞서 지역민들이 향촌의 전통 리(里) 조직을 통해 일제의 무단통치를 반대하며 수암면사무소와 수암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운동을 펼친 항일 독립운동으로, 민족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역사적 배경]

수암면은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와 경기도 안산시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구획되었다. 수암면의 중심은 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이지만, 당시 수암면을 이루던 행정구역은 지금의 시흥시 목감동·연성동·능곡동 지역을 포함한다.

구한말(舊韓末) 일제 침략의 위기 상황에서 항일 의병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안산군의 대표적인 장시(場市)인 석곡산대장(石谷山垈場)에서는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으로 인해 1896년 안산군민들이 봉기하여 정부의 친일적 행태를 성토하는 대규모 민중 집회가 열렸다. 민족주의자들은 안산군 초산면 목암리 등에서 국채보상운동과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하였고, 와리 반촌 등에서는 안산군수의 독려를 받으면서 사립학교를 활발히 설립하였다. 전통 서당도 민족 교육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일제의 식민지가 된 가운데, 토지 조사 사업 등 경제적 침탈 속에서 봉건주의 잔재인 지주 소작제(地主小作制)가 식민지 지주제로 강화되었다. 1916년 3월 당시 수암면은 전체 호수의 약 93%가 농업에 종사했는데 경작지 중 논의 66.7%, 밭의 56.7%가 소작지로 농민층 상당수가 소작이었다. 또한 전체의 77%는 연간 수입이 300원이 채 안 되는 빈곤층이었고, 150원 이하의 절대적 빈곤층도 전체의 절반에 가까웠다. 여기에 일제의 무단통치를 수행하는 하부 통치 기구에는 수암면사무소와 수암주재소가 있었다.

[경과]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수암면에서도 비석거리[비립동(碑立洞)] 만세운동이 비밀리에 모의되었다. 와리의 홍순칠(洪淳七), 능곡리의 윤병소(尹秉昭)는 3월 30일 수암리 비립동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 모이라는 격문을 듣고 있었다. 또한 화정리 주민들은 “집합하지 않으면 방화한다.”라는 격문을 암암리에 전달받고 있었다. 홍순칠은 3월 29일 국유지 소작인 수 명에게 격문의 내용을 알리고 대형 태극기 2기와 작은 기를 준비하였다.

3월 30일 수암면 비석거리에는 18개 동리 주민들이 지휘자의 인솔을 따르거나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오전 10시가 안 된 시각, 1,300여 명이 모였다. 홍순칠은 허치선(許致善) 집에서 소작인 30인을 인솔하여 미리 제작한 태극기를 가지고 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월피리 유익수(柳益秀)는 성포리 구장(區長)의 부탁으로 주민 30명을 인솔하여 왔으며, 화정리 구장 김병권(金秉權)도 주민 30여 명과 함께 도착하였다. 이 사이 주민은 2천여 명으로 늘었다. 이때 순사가 와서 “해산하라. 그러지 않고 읍내로 갈 때는 발포할 것이다.”라고 협박하자 주민들이 동요하였다. 그때 유익수가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읍내 쪽으로 가니 군중들이 뒤따랐다. 산현리 윤동욱(尹東旭)이 선두에 서서 주재소, 보통학교,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흥분한 군중들이 수암주재소[지금의 안산시 수암동 478-1]와 수암면사무소[지금의 안산읍성 및 관아지]를 습격하려 하였다. 이에 윤동욱은 “여러분, 우리가 독립되면 관공서는 우리 국유 재산이니 털끝만큼도 상하게 마라.”며 무마시켰다. 그리고 보통학교 앞에서 순사(巡査) 임건호(任健鎬)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니 만세를 부르라.”고 하였으나 임건호는 응하지 않았다. 공자묘[향교]에 이르러 순사들이 줄기차게 해산을 종용하고 사격 자세로 대열을 위협하는 가운데, 윤병소의 지도 아래 모두 자진 해산하였다.

[결과]

일제는 4월 5일 주동자 일제 검거를 실시하여 유익수, 윤병소, 홍순칠, 윤동욱, 김병권, 이봉문 등을 체포하였다. 이들은 경성지방법원에 보안법 위반으로 회부되어 5월 27일 1심 판결에서 판사 카가미[鏡一以]가 이들에게 6월에서 1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후 상고하였는데 경성복심법원 형사 제4부 판사 이토 준키치[伊東淳吉]가 원판결(原判決)을 취소하고 옥중에서 순국한 윤병소 외에 감형하여 홍순칠 징역 6월, 유익수 징역 1년, 윤동욱 태형 90대, 김병권 태형 90대, 이봉문 징역 6월을 각각 선고하였다.

[의의와 평가]

수암면 3.1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 수암면사무소와 수암주재소의 가혹한 수탈과 민족적 억압에 맞서 지역민들이 향촌의 전통 리 조직을 통해 거국적인 3.1운동에 동참하였고, 이를 민족 독립운동으로 발전시킨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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