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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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民獻 |
영어공식명칭 | Yun Minheon |
이칭/별칭 | 익세(翼世),태비(苔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권 |
[정의]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에서 활동한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윤민헌(尹民憲)[1562~1628]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경기도 안산 궤화동(樻火洞)[지금의 시흥시 산현동] 출신으로 1609년(광해군 1) 증광시로 관직에 나아가 1618년(광해군 10) 대동찰방(大同察訪)에서 해임되어 돌아와 살다가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 다시 조정에 나가 공조참의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산현동으로 돌아와 사망하였다.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익세(翼世), 호는 태비(苔扉). 고조할아버지는 윤사로(尹師路)의 손자 윤승유(尹承柳)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성종의 11번째 딸인 정숙옹주(靜淑翁主)와 혼인한 영평위(鈴平尉) 윤섭(尹燮)이다. 할아버지는 윤지함(尹之諴)이다. 아버지는 호조좌랑 윤엄(尹儼)이고 어머니는 화산군(花山君) 김주(金澍)의 딸이다. 부인은 감정(監正) 김찬선(金纘先)의 딸이다. 동생은 윤민일(尹民逸)이고 아들은 이조판서 윤강(尹絳)이며, 사위는 예조판서 채유후(蔡裕後)이다. 숙종의 재위 기간 형제간 정승을 한 윤지선(尹趾善)과 윤지완(尹趾完)이 손자이다.
[활동 사항]
윤민헌의 외할아버지 김주는 명종·선조 연간 사림계의 유현(儒賢)으로 존경받던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와 친밀히 교유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윤민헌은 동생 윤민일과 경기도 파주의 성혼을 찾아가 우계 서실(牛溪書室)에서 수학하였다. 성혼은 윤민헌에게 “매양 명예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가르침을 주어 평생 가슴속에 새기며 살았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1609년(광해군 1) 증광시 병과 13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형조좌랑을 거쳐 1612년(광해군 4)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형조정랑으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면서 대북파(大北派)로 정국이 어지럽자 외직을 자청하여 괴산군수로 나갔다가 파직되었다. 1617년(광해군 9)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다시 기용되어 그해 가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올랐으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이듬해 대동찰방으로 나갔다가 해임되어 고향인 안산 궤화동 선조 묘 아래로 와서 살았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되고 사헌부장령, 내섬시정(內贍寺正), 평안도절도사에 임명된 후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도와 충청도 공주로 갔다. 이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공조참의에 올랐다. 병으로 사직하고 산현동 선조 묘 아래 옛집으로 돌아와 1628년(인조 6) 7월 22일에 사망하였다. 파평 윤씨(坡平尹氏) 세장지(世葬地)인 시흥시 산현동 선조 묘 곁에 장사지냈다.
[학문과 저술]
윤민헌은 사림이자 서인의 거두 성혼의 가르침을 받았다. 자성(資性)이 순정(純正)하고 일을 당하여 스스로 지킬 줄 알았으며, 경전과 역사에 밝고 시를 잘 지었다. 그리고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를 스스로 익혀 해서(楷書)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묘소]
윤민헌의 묘는 경기도 시흥시 산현동 산53에 있다. 1647년(인조 25) 부인 연안 김씨(延安金氏)가 사망하여 묘를 따로 썼다가 1648년(인조 26)에 지금의 선조 무덤 오른쪽 산기슭에 함께 이장하였다. 2002년 3월 15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662년(헌종 3)에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아들 윤강이 당상관인 숭록대부판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오르자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거하여 추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