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5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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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鼐 |
영어공식명칭 | Jeong Nae |
영어음역 | Jeong Nae |
영어공식명칭 | Jeong Nae |
이칭/별칭 | 조수(調叟)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욱 |
출생 시기/일시 | 1491년 - 정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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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48년 - 정내 사망 |
거주|이주지 | 정내 이주지 - 전라남도 순천시 |
성격 | 입향조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정의]
조선 전기 순천 지역에 세거하던 경주정씨의 순천 입향조.
[가계]
정내(鄭鼐)[1491~1548]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조수(調叟)이다. 계림군(鷄林君) 정지년(鄭知年)[1395~1462]의 증손자이며, 아버지는 이조참의 정효종(鄭孝宗)이다. 정내는 남원 지역으로부터 순천 지역에 옮겨와서 살았다. 개성왕씨 왕침(王琛)의 딸과 혼인하여 을묘왜변 때의 명장인 정승복(鄭承復)[1520~1580]을 아들로 두었다.
[활동 사항]
정내와 관련된 정확한 기록이 부족해 자세한 활동 사항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기묘사화를 전후한 시기에 외가인 창원정씨 집안이 사화에 연루되면서 일가가 남하한 것으로 추측된다. 『강남악부』에는 정내가 부모를 섬기는 데 효성이 지극하였고, 자신을 보살피는 데는 공경스럽고 근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더불어서 정내를 ‘낙이군자(樂易君子)’라 하였으며, 정내의 집안을 ‘효자의 집안’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학문과 저술]
정내에 대한 행적은 조선 전기의 문관인 소세양(蘇世讓)[1486~1562]이 작성한 정내의 묘표(墓表)에 기록되어 있다.
[묘소]
정내가 세상을 떠날 때는 향(鄕) 중 도내 사람들이 선인(善人)이 돌아가셨다며 크게 애석해했다.
[상훈과 추모]
정내의 아들인 정승복이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을 맞아 공을 세웠고, 후손들은 임진왜란 때 군량미 조달과 의병장으로 참전해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