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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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翼再 |
영어공식명칭 | Hwang Ik-jae |
영어음역 | Hwang Ik-jae |
영어공식명칭 | Hwang Ik-jae |
이칭/별칭 | 재수(再叟),백화재(白華齋)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욱 |
[정의]
조선 후기 순천부사를 역임한 문관.
[가계]
황익재(黃翼再)[1682~1747]의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재수(再叟), 호는 백화재(白華齋)이다. 황희(黃喜)[1363~1452]의 10대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황집(黃緝), 할아버지는 황재윤(黃載胤)이다. 아버지는 증 좌승지 황진하(黃鎭夏)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 김진익(金震釴)의 딸이다. 부인은 청송심씨(靑松沈氏) 심종(沈棕)의 딸이다.
[활동 사항]
황익재는 작은아버지인 황진화와 심계량(沈季良)에게 수학하였다. 1702년(숙종 28)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승문원부정자, 승문원저작,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고, 1716년(숙종 42) 35세의 나이에 순천부사로 부임하여, 2년의 임기를 마쳤다.
황익재는 순천부사로 부임한 다음 백성들의 실정을 자세히 조사하였다. 순천부는 행정 규모에 비해 경제적인 여건은 열악하였다. 특히 황익재가 부임했던 시절 순천 지역은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의 민생이 아주 어려웠다. 황익재는 우선 순천부의 실정을 파악하고, 아홉 가지를 가장 큰 폐단으로 지적하였다. 지주제의 확산, 궁방의 절수, 군액의 과중 등이 그것이었다.
순천부의 폐단을 파악한 황익재는 두 가지 방향으로 대책을 마련하였다. 그것은 백성들에게 경제적인 안정을 줄 수 있는 ‘양민(養民)’과 정신적인 풍요를 주는 ‘교민(敎民)’이었다. 양민책으로는 당시 가장 큰 문제였던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수령과 향리들이 운영함으로써 고리대나 조세처럼 인식되던 환곡을 없애고, 순천부 전역에 사창(社倉)을 설립하였다. 관청에서 사창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곡식을 마련하고, 민간이 자치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진휼청(賑恤廳)도 설치하여, 사창제로도 경제적 안정을 유지할 수 없는 이들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진휼청을 운영함으로써 평상시엔 물가를 조절하고, 흉년이 들면 진휼 기능을 맡게 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사창제를 보완하려는 계획이었다.
이와 함께 향약을 실시하여, 성리학적 윤리를 확산시키려 하였다. 아울러 향약의 규정에 고리대를 금지함으로써 사창제와 서로 보완하는 체계를 만드는 한편, 교육 진흥책도 포함함으로써 학교 교육과도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아울러 교육기관으로서 기능이 퇴락해 있던 향교의 기능을 진작시키기 위해 사설교육기관으로서 양사재를 설립하였다. 2년 동안의 재임 기간 황익재는 순천부의 폐단을 목도하고 바로잡으려 노력하였고, 상당 기간 순천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학문과 저술]
황익재는 49세 때인 1730년(영조 6)부터 7년 동안 평안도 구성[현 평안북도 구성시]에 유배되어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를 초하였고 오례의 등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저서로 『화재집(華齋集)』·『서행일록(西行日錄)』이 있다.
[묘소]
황익재의 묘소는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환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순천향교에 양사재를 세운 것을 찬양하는 부사황익재흥학비(府使黃翼再興學碑)가 있으며, 상주의 봉산사(鳳山祠)에 제향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