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600329
한자 順天鄕約
영어공식명칭 Suncheon Powerful Family
영어음역 Suncheon Powerful Family
영어공식명칭 Suncheon Powerful Famil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순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욱

[정의]

조선 후기 순천 지역에서 시행했던 향촌 규약이나 그 규약에 근거한 조직체.

[임진왜란 이후 동약의 시행]

순천에서 향약은 1716년(숙종 42) 11월부터 1718년 11월의 어느 시기까지 순천부사 황익재(黃翼再)[1682~1747]가 주도해 시행했다. 그런데 황익재가 쓴 「향약절목」의 서문을 보면, 성현이 정한 향약 규례와 함께 순천부 사족들이 시행했던 동약(洞約)을 참고해서 절목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보면 수령이 주도하는 이른바 수령향약 시행 이전에도 순천에서는 동약의 형태로 향약이 시행되었으며, 황익재가 향약을 재시행하기 전에는 폐지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순천 인근에서는 일찍부터 향약이 시행되었다. 1451년(문종 원년) 광주에서 이선제(李先齊)와 안철석(安哲石)이 주도하여 향약을 시행했고, 태인에서도 1470년(성종 원년) 정극인이 향약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순천의 향약 시행을 이렇게 이른 시기까지 올려 잡기는 어렵다. 대체로 임진왜란 이전에는 주로 군·현 단위에서 시행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대부분 자연촌을 중심으로 한 동계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의 동계는 양반, 상민, 천인이 함께 참여하는 상하합계(上下合契)의 형태를 취하였고, 사족[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 농민을 지배하던 계층]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주위의 여러 민촌(民村)과 하층민을 구성원으로 편입하였다. 순천에서도 ‘동약’이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자연촌을 중심으로 한 상하합계 형태의 동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상하합계는 성리학적 명분을 강화하는 한편 성실한 조세 납부를 강조하였다. 이는 하층민의 성장으로 인한 신분질서 해체를 막고 상·하민 질서를 재확립하려는 의도를 가지는 한편, 수령권과 마찰을 피하려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족의 향촌 사회 내에서 지위가 약화되면서 수령은 사족만을 향촌 지배의 동반자로 삼을 수 없게 되었다. 수령은 이향층(吏鄕層)은 물론 새롭게 성장한 부민층(富民層)도 향촌 지배에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경재소(京在所)의 혁파와 「영장사목(營將事目)」의 반포로 인해 사족은 동약을 지속할 의미가 없어졌다. 이 때문에 황익재가 순천부사로 부임했을 때 동약은 더는 시행되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수령 향약의 시행과 내용]

황익재가 시행한 순천향약은 수령이 주도한 향약이었다. 순천향약은 서문에 향약을 시행하는 취지를 설명한 전문(前文)과 17개 조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황익재는 “평소 순천은 물산이 풍부한 곳이고 백성들도 부유한 곳이지만, 그렇더라도 교화가 필요하다. 하물며 기근이 심한 이때에 백성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행하지 않으면 풍속이 붕괴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순천 사족들의 도움을 기대하며, 선현들이 정한 향약과 순천 사족들이 시행했던 동약을 참고하여 순천향약의 시행 세칙을 만들었다.”라고 그 의도와 취지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시행 내용을 규정한 17개 조목을 보면, 황익재가 경북 상주 출신 퇴계학파 출신 관료임을 반영하듯 예안향약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예안향약은 여씨향약의 4대 강목 중 과실상규의 내용을 가장 중시하였는데, 순천향약도 마찬가지였다. 17개 조목 중 13개 조목이 모두 별칙 규정이었다. 그것도 성리학적 윤리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강하게 규제하였다. 효도, 우애, 부부간 윤리, 친척 간 화목, 신분질서를 거스르는 자들에 대한 벌칙을 정하고 있다. 다만 예안향약에서는 벌칙 규정을 명기하고 있지 않지만, 순천향약에서는 죄의 경중에 따라 상, 중, 하 3등급으로 나누고, 또 벌칙을 명시하였다. 양반은 상벌의 경우 관에 알리고, 중벌과 하벌은 태형에 처하는 한편, 노비나 상민의 경우는 태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나머지 네 조목 중 두 조목은 환난상휼과 관련된 것이다. 황익재가 시행한 향약은 사창제 시행과 결부되어 있었다. 황익재는 고리대의 성행이 민생을 파탄시킬 뿐 아니라, 풍속의 파괴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고리대가 성행하는 폐단을 언급하면서, 향후 사채를 줄 때 그 이자는 연간 100%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순천향약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향약 시행을 교육과 결부시키고 있는 점이다. 지역의 명망 있는 학자를 각 리의 훈장으로 초빙하여 교육하게 하고, 그 성과에 따라 상벌(賞罰)을 내리도록 규정하였다. 향촌 교화를 교육과 연계시키는 것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공통된 시각이었다는 점에서 특이할 것은 없다.

마지막으로 순천향약 역시 다른 수령 향약과 마찬가지로 부세 운영과 관련된 내용이 없다. 황익재가 순천 사족들의 도움을 받아 향약을 시행하겠다고 서문에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세 행정과 관련해서는 순천 사족들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이는 사족들의 향약 이해와 관점이 크게 다른 것이었다. 사족들은 자신들이 주도해 향약을 시행할 때 부세 운영에 관한 내용이 제외된다면, 그러한 향약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즉 향약 시행의 주목적 중 하나가 부세 운영권 참여를 통한 향권(鄕權)의 안정적 유지가 사족들의 향약 시행 목적이었다. 그러나 황익재가 시행한 향약에서는 부세 운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고, 이 때문에 순천 사족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황익재가 순천부사를 그만둔 이후 수령이 주도하는 향약은 더는 시행되지 않았다.

[19세기 면약의 시행]

한동안 시행되지 않던 향약은 1829년(순조 29) 새롭게 시행되었다. 이때의 향약은 군현 단위가 아닌 면 단위로 운영되어 더욱 대민적이고 대면적인 관계로 발전하였다. 1859년(철종 10)에 작성된 향약절목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심화되어 갔다. 구체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향약원들이 1월, 4월, 7월, 10월 등 1년에 네 차례 향약을 읽는 의식을 행하는 데, 모두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정한 바에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마을마다 상유사(上有司)와 하유사를 두는데, 하임은 상임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하였다. 그리고 면임의 우두머리인 풍헌은 양반을, 실무자인 약정 등은 중민 중에서 근실한 자를 임명하도록 하였다. 마지막으로 부세 운영과 관련된 문제는 반드시 풍헌, 약정, 도영장의 3면임에게 책임을 맡기고, 별도의 인원을 뽑지 않도록 하였다. 아울러 수령과 대면할 때는 반드시 사족으로 구성된 집강 5인이 자리를 함께한 뒤에 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절목 내용을 보면 반상의 구별을 전제로 하고, 면 단위로 향약을 시행함으로써 대민 통제를 강화하려는 지방관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부세 운영과 관련한 면임의 책임을 강조하는 한편, 면임의 우두머리인 풍헌은 반드시 양반이 맡도록 규정함으로써, 양반들이 부세 운영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는 면모를 보인다.

따라서 이 시기에 시행되었던 순천향약은 면리 내에서 상하질서를 엄격히 하고 그 위로 집강체제를 둔다는 점에서 지배 사족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기능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1859년(철종 10) 정비된 향약이 시행된 지 얼마 안 된 1862년 순천에서도 농민항쟁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향약 시행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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