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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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碑 |
이칭/별칭 | 비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에 있는 사적(史蹟)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나무·돌·쇠붙이 등에 글을 새겨 놓은 것.
[개설]
비(碑)는 기록한 재질에 따라 목비(木碑)·석비(石碑)·철비(鐵碑)로 구분되나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대부분 돌에 새긴 석비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비는 대부분 기념비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조상과 같은 특정 인물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확인되는 비 역시 주로 기념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의성군에 있는 비들은 그 목적과 성격에 따라, 수령비·묘비·신도비·공적비·유허비·기념비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조성 시기는 대부분 조선 후기 이후이며, 지금도 문중이나 지역 단체 주도로 비가 조성되고 있다.
[의성군의 주요 비 현황]
1. 수령비(守令碑)
수령비는 수령이 해당 고을에서 이루어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우는 것으로, 선정비(善政碑)·불망비(不忘碑)·애민비(愛民碑)·청덕비(淸德碑)·청백비(淸白碑)·송덕비(頌德碑)·거사비(居思碑) 등으로 불린다. 의성군의 수령비는 현재까지 45개가 보고되었다. 의성읍 상리리에 위치한 고려 김장군 순절비(高麗 金將軍 殉節碑), 의성읍 중리리의 고려 태자 첨사 의성군 김공 진민사 유지비(高麗 太子 詹事 義城君 金公 鎭民祠 遺址碑)를 제외하고는 조선 시대 의성 현령(義城縣令)과 비안 현감(比安縣監)을 비롯하여 군수(郡守)·목사(牧使) 등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수령비는 읍치(邑治)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 산재하여 개별적으로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몇몇 구역에 모여 있다. 수령비가 많이 모여진 곳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원당리 산1, 다인면 서릉리 4-3, 다인면 양서리 514, 안계면 봉양리 363-1, 안계면 위양리 산41, 비안면 용남리 산2-1, 단밀면 주선리 산9이다. 다만 이용준 영세 불망비(李容準 永世 不忘碑)의 경우 의성군의 대표적인 고찰인 고운사(孤雲寺)[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에 소재한다.
2. 묘비(墓碑)·신도비(神道碑)
묘비와 신도비는 모두 죽은 이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무덤 앞에 세운 것이다. 주요한 것으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왕조 교체기 의성에 은거했던 오국화(吳國華)의 신도비(神道碑)[의성읍 업리]와 조선의 개국 원종공신(開國 原從功臣)으로 조선 초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한 정영손(丁令孫)의 신도비[의성읍 중리리], 고려 말 태자 첨사(太子詹事)를 역임한 김용비(金龍庇)의 신도비[사곡면 토현리], 고려 시대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를 역임한 김성단(金成丹)의 신도비[의성읍 중리리], 조선 후기의 무신 장한상(張漢相)의 묘비[비안면 외곡리],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출신 김희(金喜)의 묘단비(墓壇碑)[비안면 장춘리] 등이 있다.
3. 충효비(忠孝碑)
충효비는 전근대에 충과 효를 몸소 실천한 인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기리는 인물의 성격과 행적에 따라 정려비(旌閭碑)·정효비(旌孝碑)·효자비(孝子碑)·순절비(殉節碑)·열부비(烈婦碑)·정렬비(貞烈碑)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의성에서 충과 관련된 주요한 것은 병자호란 때 군사를 일으켰던 김득민(金得民)의 충효비(忠孝碑)[의성읍 팔성리], 후삼국 전쟁기에 의성을 지키다 순절한 홍술(洪術)의 순절비[의성읍 상리리],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치중(金致中)[?~1592]의 의열비(義烈碑)[점곡면 송내리], 한말 의병장인 이필곤(李苾坤)[1864~1907]의 순국 기념비(殉國記念碑)[사곡면 오상리],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김엽(金燁) 3형제의 삼충비(三忠碑)[봉양면 분토리] 등이 있다.
효성을 기리는 비로는 신원록(申元祿)[1516~1576]의 정효비(旌孝碑)[의성읍 도동리], 김윤산(金允山)[1784~1816]의 정려비[옥산면 금학리], 김창운(金昌雲)[1825~1876]의 숭효비(崇孝碑)[춘산면 효선리], 박하륜(朴河倫)[1748~1787] 부부의 효열비(孝烈碑)[춘산면 옥정리], 윤치구(尹致九)의 이효비(二孝碑)[금성면 도경리], 도금동(都今同)[?~1583]의 정려비, 신지효(申之孝)[1561~1592]의 순효비(殉孝碑)[봉양면 길천리], 권상두(權相斗)[1870~1936]의 효자비(孝子碑)[단밀면 생송리], 1965년 칠십의 노구로 삼년상을 치른 김동문(金東文)의 표효비(表孝碑)[단밀면 생송리], 김종숭(金鍾崇)[1856~1923]의 효자비[단밀면 생송리], 김형석(金衡錫)[1655~1703]의 정려비[단밀면 생송리], 김형석(金炯石)[1848~?]의 정효비[단밀면 생송리], 임성무(林盛茂)[1637~1729]의 정효비, 정악(鄭岳)[1779~1839]의 숭효비[단밀면 주선리], 김옥진(金玉鎭)의 표효비[안계면 양곡리], 변용(卞勇)[1443~1488]의 정려비[안계면 위양리], 장문서(張文瑞)[1507~1577]의 정려비[안계면 교촌리], 김제균(金濟均)[1796~1885]의 정효비[다인면 송호리], 최경석(崔慶碩)[1856~1900]·최경순(崔慶淳)[1860~1912] 형제의 쌍효비(雙孝碑) 등이 있다.
열부를 기리는 비로는 영조 연간에 활동한 김종행(金宗行) 처 성주 이씨(星州 李氏)의 정렬비(貞烈碑)[의성읍 팔성리], 윤성모(尹聖模)의 처 구산 박씨(龜山 朴氏)[1912~1948]의 창렬비(彰烈碑)[봉양면 문흥리], 정태을(鄭太乙)의 처 박씨(朴氏)[?~1592]의 순절비[봉양면 장대리], 임진왜란 때의 열부 김철(金喆) 처 남양 홍씨(南陽 洪氏)의 정려비[비안면 서부리], 조선 말기에 활동한 배치용(裵致瑢) 처 순흥 안씨(順興 安氏)의 효열비(孝烈碑)[비안면 쌍계리], 김덕휘(金德輝) 처 영양 남씨(英陽 南氏)[?~1939]의 효열비[구천면 유산리], 현대의 효부로 의성 군수에게 표창을 받은 양종기(梁宗基)의 처 권씨(權氏)의 효부비(孝婦碑)[단밀면 생송리], 이민화(李敏華)의 처 안동 권씨(安東權氏)[1696~?]의 표열비(表烈碑)[단밀면 주선리], 정국주(鄭國柱)의 처 안강 노씨(安康 盧氏)[1761~1781]의 표열비[안계면 위양리], 임진왜란 때 죽은 홍씨(洪氏)·여씨(呂氏)·문씨(文氏) 삼부녀를 기리는 정렬비[다인면 용곡리] 등이 있다.
4. 유허비(遺墟碑)
의성과 관련된 인물로 의성 현지에 행적을 남겼을 경우,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해당 장소에 세우는 비이다. 또한 이 비는 과거에 있었으나 사라진 건물의 터에도 세워지는데, 유허비·유지비(遺址碑)·유적비(遺蹟碑) 등으로 불린다.
주요 유허비로는 효자 오천송(吳千松)[?~1639]의 자취를 기리는 유허비[의성읍 팔성리], 고려 말 충신 이양오(李養吾)의 사단비(祀壇碑)[의성읍 상리리], 훼철된 진민사(鎭民祠) 옛 터에 세워진 유지비(遺址碑)[의성읍 중리리], 오국화의 유허비[단촌면 세촌리], 조선 전기 문신 권식(權軾)[1428~1485]의 유허비[점곡면 서변리], 임진왜란 때 공이 있던 박장춘(朴長春)[1523~1595]의 유허비[가음면 현리리], 성종 연간의 진사(進士) 이세남(李世南)의 유허비[가음면 가산리], 조선 전기 문신 김내옹(金乃甕)의 유적비[금성면 구련리], 조선 후기 무신 신정모(申正模)[1691~1742]의 유허비[의성읍 팔성리], 유학자 이명천(李命天)[1708~1755]의 유적비[금성면 산운리], 문신 신홍망(申弘望)[1600~1673]의 유허비[봉양면 구미리], 임진왜란 의병장 김희의 유허비[비안면 서부리], 임진왜란 의병장 박사숙(朴嗣叔)의 유허비[비안면 이두리], 충렬사(忠烈祠) 옛 터에 세워진 유지비(遺址碑)[비안면 용천리], 고려 말기의 문신 신우(申祐)의 유허비[단밀면 주선리], 대제지(大堤池) 유허비[안계면 용기리], 한말의 효자 김주건(金疇鍵)[1840~1900]의 유허비[신평면 덕봉리] 등이 있다.
5. 공적비(功績碑)
의성과 관련된 특정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공적비·사적비(事蹟碑)·송덕비(頌德碑) 등으로 불린다.
의성 지역의 주요 공적비로는 신원록의 사적비[의성읍 도동리], 한말 사재를 털어 문소 학교(聞韶 學校)를 건립한 오진선(吳進善)의 공적비[의성읍 후죽리], 19세기 고운사에서 수양하였던 수월 대선사(水月 大禪師)를 기리는 수월 대선사비(水月 大禪師碑)[단촌면 구계리], 같은 사찰에서 수양한 함홍당 대선사(涵弘堂 大禪師)를 기리는 함홍당 대선사비(涵弘堂 大禪師碑)[단촌면 구계리], 17세기 의성 지역 교화에 앞장섰던 윤은보(尹殷甫)[1577~1648]의 상덕비(尙德碑), 금성 고등학교 건립자 김규태(金奎泰)[1880~1954]의 송덕비(頌德碑)[금성면 대리리], 의성군에서 면작을 시작한 고려 말 문신 문익점(文益漸)을 기리는 문익점 면작 기념비(文益漸 棉作 記念碑)[금성면 대리리], 17세기 후반 의성 출신 인사로 사재를 털어 대야제(大也堤)를 건립한 박이장(朴以樟)의 공적비[금성면 하리],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 박재화(朴在華)의 기적비(紀蹟碑)[금성면 대리리], 조선 말기 지역 백성들을 구휼한 박정택(朴貞宅)의 유덕비(遺德碑)[금성면 만천리], 독립 운동가 이태직(李泰稙)[1878~1913]의 항일 운동 기념비(抗日運動記念碑)[금성면 산운리], 유학자 김종희(金鍾禧)[1861~1938]의 사적비[비안면 장춘리], 조선 전기 문신 박서생(朴瑞生)의 사적비[비안면 용천리], 독립 운동가 박석홍(朴錫洪)의 기념비[비안면 이두리], 쌍계 초등학교에 세워진 3·1 독립 투사들의 기념비[비안면 쌍계리], 임진왜란 때 비안 향교(比安鄕校)의 위패를 모셨던 선비 손복(孫福)의 표의비(表義碑)[비안면 옥연리], 비안 초등학교를 건립한 이종섭(李鐘燮)의 공적비[비안면 서부리], 1913년 개천지(開天池)를 중수한 강기덕(康基德) 등을 기린 강기덕 개천지 중축비(康基德 開天池 重築碑)[안계면 봉양리], 독립 운동가 김경성(金慶聲)[1878~1943]의 기념비[안계면 위양리], 3·1 운동 때 시위를 주도한 김옥돈(金玉頓)의 공적비[안평면 대사리], 이만준(李萬俊)의 공적비[안평면 대사리], 이봉수(李鳳壽)의 기의비(紀義碑)[안평면 대사리], 이수원(李守元)의 공적비[안평면 도옥리], 이흔이(李欣伊)의 공적비[안평면 대사리], 3·1 운동을 주도하다 옥중에서 순국한 이양준(李良俊)의 순국비[안평면 대사리] 등이 있다.
6. 사적비(事蹟碑)
의성군에서 일어났던 기념비적인 사건 등을 기리거나 어떠한 건물의 연혁을 기록한 것으로 그 성격에 따라 사적비(事蹟碑)·기념비(記念碑) 등으로 불려진다.
의성 지역에서 사건을 기리기 위해 세운 주요 사적비로는 1992년 문소루(聞韶樓)를 중건하고 세운 문소루 중건 기념비(聞韶樓 重建 記念碑)[의성읍 원당리], 1918년 고찰 고운사의 사적을 기록하고 세운 고운사 사적비(孤雲寺 事蹟碑)[단촌면 구계리], 보호림인 점곡면 사촌리 내 서림(西林)의 조성 경위를 기록한 사촌 서림 사적비(沙村 西林 事蹟碑)[점곡면 사촌리], 안동 김씨의 사촌 마을 입향을 기리기 위해 세운 안동 김씨 사촌 입향 육백년 추원비(安東 金氏 沙村 入鄕 六百年 追遠碑)[점곡면 사촌리], 문익점의 목화 재배 경위를 기리는 문익점 목면 유전비(文益漸 木棉 遺田碑)[금성면 제오리], 비안면에서 일어났던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3·1 독립운동 기념탑(獨立運動 記念塔)[비안면 이두리], 속수 서원(涑水書院)의 사적을 기록한 속수 서원 사적비(涑水 書院 事蹟碑)[단밀면 생송리], 개천지의 사적을 기록한 개천지 사적비(開天池 事蹟碑)[안계면 봉양리], 비안 향교를 보수하고 세운 비안 향교 유도 중흥비(比安 鄕校 儒道 中興碑)[안계면 교촌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