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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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喆妻南陽洪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하창환 |
[정의]
조선 후기 의성의 열녀.
[가계]
참봉(參奉)을 지낸 홍간(洪諫)의 딸로 태어나 선산인(善山人) 김철(金喆)과 혼인하였다. 김철은 고려 말의 충신 백암(白巖) 김제(金濟)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예복(金禮復)이다. 김철은 4형제 중 셋째로 맏형인 김희(金喜)는 의병장으로 단밀 전투에서 순직하였으며, 동생인 김계(金啓)는 「용사일기(龍蛇日記)」와 「용담록(龍潭錄)」을 남긴 학자였다.
[활동 사항]
김철(金喆) 처 남양 홍씨 [?~?]는 명망 높은 집안의 출신이다. 임진왜란을 당해 남편과 함께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들이닥친 왜병에게 포로가 될 처지가 되었다.
이에 남편이 홍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선비를 자처하면서 어찌 왜놈의 포로가 될 수 있으리오.” 말을 마친 남편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그러자 홍씨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께서 이미 열사로 자결하셨으니 소첩인들 어찌 열사의 처가 되지 않겠습니까.” 홍씨는 남편이 자결한 칼로 자신의 목을 찌르고 남편 위로 쓰러졌다. 두 사람의 피는 낭자하게 흘러 땅을 적셨다. 이들의 의기에 놀란 왜적들은 달아나듯 자리를 떠났다. 왜적이 물러가자 집안 사람들이 서둘러 지혈을 하여 다행히 소생하였다.
[상훈과 추모]
비안 현감 이노(李魯)가 남양 홍씨의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정려가 세워졌다. 지금은 정려각이 허물어져 없어지고 다만 큰 바위 위에 세운 정려표(旌閭表)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