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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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元堂里碑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홍술로 106[원당리 산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용만 |
건립 시기/일시 | 1633년 11월 - 현령 정공세규 선정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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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645년 4월 - 현령 엄후정구 영세 불망비 건립 |
건립 시기/일시 | 1696년 9월 - 현령 이후익저 청덕 애민비 건립 |
건립 시기/일시 | 1702년 6월 - 현령 김후진화 휼민 선정 거사비 건립 |
건립 시기/일시 | 1779년 3월 - 현령 홍후락빈 영세 불망비 건립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859년 7월 - 현령 홍후낙빈 영세 불망비 중건 |
건립 시기/일시 | 1865년 - 현령 조후명하 영세 불망비 건립 |
건립 시기/일시 | 1881년 7월 - 현령 김후병섭 애민 선정비 건립 |
건립 시기/일시 | 1883년 7월 - 현령 이후휘응 거폐 불망비 건립 |
건립 시기/일시 | 1888년 5월 - 현령 한후응주 애민 선정비 건립 |
건립 시기/일시 | 1888년 6월 - 현령 한후응주 영세 불망비 건립 |
건립 시기/일시 | 1896년 3월 - 현령 이후관영 선정비 건립 |
건립 시기/일시 | 1903년 11월 - 군수 서후상학 청덕 거사비 건립 |
현 소재지 | 원당리 비석 떼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원당리 산1 |
관련 인물 | 김병섭|김진화|서상학|엄정구|이관영|이익저|이휘응|정세규|조명하|한응주|홍락빈 |
재질 | 사암 |
크기(높이) | 137.5㎝[현령 김후병섭 애민 선정비]|126.5㎝[현령 김후진화 휼민 선정 거사비]|141.1㎝[군수 서후상학 청덕 거사비]|115㎝[현령 엄후정구 영세 불망비]|147㎝[현령 이후관영 선정비]|125.3㎝[현령 이후익저 청덕 애민비]|94.6㎝[현령 이후휘응 거폐 불망비]|105㎝현령[현령 정공세규 선정비]|85.5㎝[조후명 하영세 불망비]|139.2㎝[현령 한후응주 영세 불망비]|87.5㎝[현령 한후응주 애민 선정비]|159.6㎝[현령 홍후락빈 영세 불망비] |
크기(너비) | 44.7㎝[현령 김후병섭 애민 선정비]|52.2㎝[현령 김후진화 휼민 선정 거사비]|44.3㎝[군수 서후상학 청덕 거사비]|50.7㎝[현령 엄후정구 영세 불망비]|45.5㎝[현령 이후관영 선정비]|43.2㎝[현령 이후익저 청덕 애민비]|35㎝[현령 이후휘응 거폐 불망비]|52㎝[현령 정공세규 선정비]|46.5㎝[현령 조후명 하영세 불망비]|45.37㎝[현령 한후응주 영세 불망비]|43.5㎝[현령 한후응주 애민 선정비]|47.5㎝[현령 홍후락빈 영세 불망비] |
크기(두께) | 15㎝[현령 김후병섭 애민 선정비]|16.2㎝[현령 김후진화 휼민 선정 거사비]|14.8㎝[군수 서후상학 청덕 거사비]|17.5㎝[현령 엄후정구 영세 불망비]|20.5㎝[현령 이후관영 선정비]|14.5㎝[현령 이후익저 청덕 애민비]|20.5㎝[현령 이후휘응 거폐 불망비]|20.3㎝[현령 정공세규 선정비]|17.7㎝[현령 조후명 하영세 불망비]|17.8㎝[현령 한후응주 영세 불망비]|15.3㎝[현령 한후응주 애민 선정비]|18㎝[현령 홍후락빈 영세 불망비]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홍술로 106[원당리 산1]이 있는 조선 시대 및 근대 비석 떼.
[건립 경위]
원당리 비석 떼의 건립 경위는 자료가 현전하지 않아 건립 당시 구체적인 상황을 확인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조선 말 대부분의 선정비가 그러하듯 선정을 기념하는 건립이라기보다는 혼란한 정세를 역설적으로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선정비는 건립 연대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① 현령 김후병섭 애민 선정비는 1881년에, ② 현령 김후진화 휼민 선정 거사비는 1702년에, ③ 군수 서후상학 청덕 거사비는 1903년에, ④ 현령 엄후정구 영세 불망비는 1645년에, ⑤ 현령 이후관영 선정비는 1896년에, ⑥ 현령 이후익저 청덕 애민비는 1696년에, ⑦ 현령 이후휘응 거폐 불망비는 1883년에, ⑧ 현령 정공세규 선정비는 1633년에, ⑨ 현령 조후명 하영세 불망비는 1865년에, ⑩ 현령 한후응주 영세 불망비는 1888년 6월에, ⑪ 현령 한후응주 애민 선정비는 1888년 5월에, ⑫ 현령 홍후락빈 영세 불망비는 1779년에 각각 군민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위치]
원당리 비석 떼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원당리에서 칠파리를 지나가는 국도 5호선과 지방도 914호선이 만나는 원당 삼거리에서 의성읍 방향으로 약 150m 정도 가면 의성교를 건너기 전 우측에 위치한 구방산 제9봉에 있다. 원당리 비석 떼 옆에는 문소루가 있다.
[형태]
① 현령 김후병섭 애민 선정비: 재질은 사암에 가까우며, 지붕돌[가첨석]은 옥개형[지붕형]이다. 전면에는 제액이, 뒷면에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② 현령 김후진화 휼민 선정 거사비: 재질은 사암에 가까우며, 비신은 규수귀접이형으로 지붕돌이 없다. 전면에는 제액이, 측면에는 건립연도가 새겨져 있다. 앞면은 북쪽이라 검고, 뒷면은 남쪽이라 희다. 우측 하단 부분의 훼손이 심하다.
③ 군수 서후상학 청덕 거사비: 재질은 사암에 가까우며, 비신은 월두형으로 비수와 비가 같은 돌로 되어있다. 전면에는 제액이, 뒷면에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앞면은 북쪽이라 검고 뒷면은 남쪽이라 희다. 전면 거사비 부분 ‘사’자가 박락(剝落)되었다.
④ 현령 엄후정구 영세 불망비: 재질은 사암에 가까우며, 비수의 모양은 화관형으로 고사리 문양을 새겼다. 전면에는 제액이, 뒷면에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앞면은 검고 뒷면은 희며, 전면 영세불망비 부분이 박락(剝落)되었다.
⑤ 현령 이후관영 선정비: 재질은 사암에 가까우며, 비신은 규수귀접이형으로 지붕돌이 없다. 전면에는 제액이, 측면에는 세운 해가 새겨져 있다. 앞면은 북쪽이라 검고 뒷면은 남쪽이라 희다.
⑥ 현령 이후익저 청덕 애민비: 재질은 사암에 가까우며, 비신은 화관형으로 비수와 비가 같은 돌로 되어있다. 전면에는 제액이, 뒷면에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앞면은 북쪽이라 검고 뒷면은 남쪽이라 희다.
⑦ 현령 이후휘응 거폐 불망비: 재질은 사암에 가까우며, 지붕돌은 옥개형이다. 전면에는 제액이, 뒷면에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앞면 대자도 크고, 뒷면 내용도 상당히 큰 글씨로 되어 있다.
⑧ 현령 정공세규 선정비: 재질은 사암에 가까우며, 비수의 모양은 화관형으로 고사리 문양을 새겼다. 비수와 비신이 한 돌로 되어있다. 전면에는 제액이, 뒷면에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앞면은 북쪽이라 검고 뒷면은 남쪽이라 희다.
⑨ 현령 조후명하 영세 불망비: 재질은 사암에 가까우며, 비신은 규수귀접이형으로 지붕돌이 없다. 전면에는 제액이, 대자 좌우에 내용이 새겨지고, 뒷면에 세운 연도가 있다. 전면 상단이 크게 훼손되었고, ‘불망비’ 부분은 이미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남은 부분도 뒷면의 하단 20%는 심하게 박락되었다. 앞면은 북쪽이라 검고 뒷면은 남쪽이라 희다.
⑩ 현령 한후응주 영세 불망비: 재질은 사암에 가까우며, 비신은 규수귀접이형으로 지붕돌이 없다. 훼손으로 판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⑪ 현령 한후응주 애민 선정비: 재질은 사암에 가까우며, 비신은 화관형으로 비수와 비가 같은 돌로 되어 있다. 전면에는 제액이, 뒷면에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⑫ 현령 홍후락빈 영세 불망비: 재질은 사암에 가까우며, 비신은 규수귀접이형으로 지붕돌이 없다. 전면에는 제액이, 뒷면에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앞면은 북쪽이라 검고 뒷면은 남쪽이라 희다.
[금석문]
① 현령 김후병섭 애민 선정비(縣令 金侯秉燮 愛民 善政碑)
〈원문〉
猗我明侯 日廉其治 溫愼簡黙 惟淸厥德 雷均二天 永思勿忘 河潤 四域 豊碑是刻
辛巳 閏七月 日
〈번역문〉
훌륭하도다 밝으신 우리 원님. 날마다 청렴으로 고을을 다스렸네.
온화하고 삼가고 간결하고 묵묵하심이 오직 그 덕이 맑으시도다.
원님의 은혜는 부모님 같으니 영원토록 잊지 못하네.
온 천하가 윤택하니 아름다운 돌에 글을 새기노라.
신사년(1881년, 고종 18) 윤칠월 일
② 현령 김후진화 휼민 선정 거사비(縣令 金侯鎭華 恤民 善政 去事碑)
김진화(金鎭華)[1655~?] 본관은 광주. 자는 산보(山甫). 아버지는 서포 김만중이고, 고조할아버지는 사계 김장생이다. 1702년 의성 현령으로 부임했으며, 재임 중 『동리집』[외조부 이은상의 문집]과 『서포집』[부친 서포 김만중의 문집]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원문〉
壬午 閏六月 立
〈번역문〉
임오년 윤유월에 세우다.
③ 군수 서후상학 청덕 거사비(郡守 徐侯相鶴 淸德 去事碑)
서상학(徐相鶴)[1848~?] 본관은 달성. 자는 화경(和卿). 1897년 의성 군수로 부임했으며, 1898년 남양 군수로 전임하였다.
〈원문〉
猗歟我侯 循良其績 養老說燕 興儒化蜀 酹侑祠賑 構○○玆 邦去思視此顯刻
光武 七年 癸卯 十一月 立
〈번역문〉
아아 우리 원님 어진 관리로 공적이 높도다.
늙은이를 봉양하며 연 땅을 바꾸었고
유학을 일으켜 촉 땅을 교화하였네
술을 부어 권하고 ○○○○
이 지방 백성이 떠난 분을 생각한다면
이 새겨놓은 비석을 볼 지어다.
광무 칠년(1903년) 십일월에 세우다.
④ 현령 엄후정구 영세 불망비(縣令 嚴侯鼎耈 永世 不忘碑)
〈원문〉
侯姓嚴 諱鼎耈 字重叔 壬午春 輟近侍爲○養來 値歲連歉 整儲賑恤 律已淸簡 威惠 幷行 瓜期遠飄然賦歸境 士民遮馬累日 竟不得留則 相齎咨鑱石 以票去思 銘曰 有脚之春不撓其○歸曲陽免鄕 四載爲政 永世不忘 乙酉四月 日
〈번역문〉
임오(1642년) 봄에 임금을 가까이 모시다가 부모님 봉양을 위해 이 고을에 부임했으나 연이은 흉년을 만나 관청의 곡식을 들어 백성을 구휼하였다. 자신을 단속하니 맑고 간략히 했으며, 위엄과 은혜를 함께 시행했다. 임기가 다하자 표연히 고향으로 돌아가니 온 고을 선비와 백성들이 서로 재물을 모으고 비석을 마련하여 떠난 뒤의 사모하는 정을 표하노라.
명에 이르기를 봄바람같이 소생시키는 분이 고향으로 돌아가시네 사년동안 베푼 선정 영원토록 잊지 못하네.
을유(1645년) 사월에 세우다.
⑤ 현령 이후관영 선정비(縣令 李侯觀永 善政碑)
이관영(李觀永)[1839년~?] 본관은 전주. 자는 국여(國汝). 1892년(고종 29) 의성 현감으로 부임했다, 선정의 내용은 새기지 않았다.
〈원문〉
乙未暮春也
〈번역문〉
을미(1896)년 삼월이라
⑥ 현령 이후익저 청덕 애민비(縣令 李侯益著 淸德 愛民碑)
〈원문〉
吠氅於潛 二載爲政 袴五錦城 百里風淸 丙子九月日立
〈번역문〉
평상복 차림으로 잠부론을 공부하며, 2년간 정사를 돌보셨네.
금성을 아름답게 다스리니, 백리의 고을에 풍속이 맑아졌네.
병자(1696년) 구월에 세우다.
⑦ 현령 이후휘응 거폐 불망비(縣令 李侯徽應 祛弊 不忘碑)
이휘응(李徽應) 본관은 전주. 선조(宣祖)의 9남 경창군의 9대손이다. 1882년(고종 19) 의성 현령으로 부임하였고 1883년(고종 20) 면천 군수로 전임하였다.
〈원문〉
盖聞是縣使令房座上之有歲時例索於下者未免 自齧其韀 自剝其膚而爲弊久矣 何幸仁侯 來覺如自家手足之有痌癢而輒祛之 於是索者畏見 索者懷噫 父母愛子 何間於晜季 而 晜或狹長責癸(季)以多般苦役則 父母必怒晜季而憐癸矣 何以異此 然兄弟之恩 未聞 以是而替也 癸未季夏 其徒金佑範幣要余珉文以德侯 余不忍孤其誠 遂書此以歸 侯姓 李氏 完山人 徽應云
是月之旬二日 光山 金永冑 撰 月城 李文植 書
光緖 九年 癸未 七月 使令房 立
〈번역문〉
대개 듣건데 이 고을의 사령방이 오래전 풍년이든 시절에
으레껏 아랫사람에게 요구를 하니 스스로 그 깔개를 깨물고
스스로 그 살갗의 벗김을 면하지 못하여 폐단이 오래되었다.
너무도 다행스럽게 어진 현령이 오셔서 자신의 수족에
병이 있듯이 생각하여 문득 그 폐단을 없앴다.
이에 요구하던 자들은 두려워하고 요구를 받던 자는 은혜롭게 여겼다.
아! 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어찌 형제간의
차이가 있겠는가마는 형이 혹 자신의 장점을 갖고 아우에게
여러 가지 괴로운 일을 요구한다면 부모는 반드시 형을 노엽게 생각하고
아우를 불쌍하게 여길 것이니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그러니 형제의 은혜는 이 때문에 줄어든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계미년 유월에 그들 중의 김우범이 나에게 비문을 지어 현령의 덕을
길러주기를 구하니 내가 차마 그 정성을 저버리지 못하여
드디어 이 글을 지어 돌려보낸다.
현령의 성은 이씨요, 본관은 완산인 휘응이라 이른다.
이달 12일 광산 김영주 짓고 월성 이문식 쓰다.
광서 9년(1883) 계미 7월 사령방이 세우다.
⑧ 현령 정공세규 선정비(縣令 鄭公世䂓 善政碑)
정세규(鄭世䂓)[1583~1661] 본관은 동래. 호는 동리(東里), 시호는 경헌(景憲). 1636년 병자호란 시 남한산성을 향해 진격하다가 용인 싸움에서 패하였으나 충성심을 인정받아 죄를 면제받았다. 이후 호조 참의, 전라도 관찰사, 개성부 유수, 공조 판서, 형조 판서 등으로 재임하였다. 의성 현령 재임 중 아우 정세구가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니 국법에 형제는 상피(相避)하도록 되어 있어 체직(遞職)되어 돌아갔다.
〈원문〉
侯姓鄭 名世規 字君則 崇禎辛未春下車 悃愊蕪華 安韶不煩 平易近民 民皆悅服 明年秋 侯弟鄭世矩 來巡○○侯在法當避 遂遞而歸 惜乎不久○政也 然其一歲之間 懷安之惠 入人而難忘則 宜平日之石 ○無止焉 其銘曰 慈祥愷悌 政在寬仁 ○○○○ 裁施徵有倫厖也 無吠巷門夜扃咸日來 慕父母○○慶 今其去矣 莫此一年 於獻不忘 毋使無傳 皇明崇禎六年十二月日立
〈번역문〉
숭정 신미년(1631) 봄에 의성 현령으로 부임하여
진실 되고 사치함이 없이 편안하게 고을을 다스려 번거롭게 하지 않음으로써 인근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니 백성들이 다 기뻐 감복하였다.
이듬해 가을 현령의 아우 정세구가 순찰사로 부임하니, 현령은 국법에 있어 응당 피혐해야 하므로 드디어 체직되어 돌아가게 되니 애석하게도 임기를 채우지 못하였다. 임기 일 년의 사이에 편안하게 다스린 은혜는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서 잊기가 어려웠으니 마땅히 작은 돌을 세워 명을 기록하여 가로되
자상하고 화락하니 정치는 너그럽고 어질었네
○○○○○○○○, 좋은 정치 짝할 이 없었네.
삽살개도 짖지 않으니, 마을의 문은 빗장을 걸지 않았네.
날마다 달려와서 부모처럼 그리워하네.
지금 현령께서 떠나감에, 일년 더 계시기를 붙잡지 못하니
아! 아! 잊지 못하니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네.
황명 숭정 6년(1633) 십일월에 세우다.
⑨ 현령 조후명하 영세 불망비(縣令 趙侯命夏 永世 不忘碑)
〈원문〉
氷壺淸政 廛璣石○ 洞徹無瑕 惠澤孔○ 乙丑月
〈번역문〉
얼음처럼 맑고 깨끗한 정사 廛璣石○
투명하고 밝아 한 점 흠이 없으니 원님의 은택이 몹시 크도다.
을축(1865년) 월
⑩ 현령 한후응주 영세 불망비(縣令 韓侯應周 永世 不忘碑)
한응주(韓應周)[1807~?] 본관은 서원(西原). 자는 욱재(郁哉). 21세 때 율과에 합격하였고 1827년(순조 27) 정해 증광시에 2위로 합격하였다.
〈원문〉
戊子 五月 日
〈번역문〉
무자(1884) 오월 일 세우다.
⑪ 현령 한후응주 애민 선정비(縣令 韓侯應周 愛民 善政碑)
〈원문〉
邑弊到極 吏逋刷久 侯幸莅之 官政去私 閭無猛差 爰立片石 衆頌善治 何異口碑
戊子五月 日 召文上川兩面所立
〈번역문〉
고을의 폐단이 극에 달하여 관리의 포탈이 오래되었네.
원님이 다행히 부임하셔서 관청의 정사에 사욕이 없어졌네.
이에 비석을 세우니 모두가 선정을 칭송하니
어찌 입으로 전하는 비석과 다르리오.
무자(1888) 유월에 조문, 상천 양면소에 세우다.
※조문, 상천은 현재 금성면에 속한다.
⑫ 현령 홍후락빈 영세 불망비(縣令 洪侯樂彬 永世 不忘碑)
〈원문〉
侯姓洪 名樂彬 字季文 豊山人 下車一載登柑科 棄官而歸 其間邑弊多革 吏民俱便 守衙門遮城路 攀轅累日 從間途而趍 邑人如失父母 立其石頌其德 辭曰
誠存報國 發爲淸仁 莅政一朞 流宅千春
咸豊九年 己未七月 重建
上之三年己亥三月 日立
〈번역문〉
현령의 성은 홍이요, 이름은 낙빈이며, 자는 계문, 관향은 풍산이다. 부임한지 일년 만에 감과에 급제하여 현령직을 그만두고 돌아감에 그간 고을의 폐단이 많이 고쳐지니 아전과 백성이 모두 편안해져서 관아의 문을 지키고 성의 길을 가로막고 유임을 간절히 바랐으나 막지 못하여 읍인은 부모를 잃은 것 같이 생각하여 돌을 세우고 덕을 칭송해 가로되
정성으로 보국하고자 맑고 어짐 발휘했네.
고을원으로 지낸 일년 정사 은택의 흐름은 천년이네.
함풍 구년(1859) 기미 칠월에 중건
상지 삼년 기해(1779) 삼월에 세우다.
[현황]
원당리 비석 떼 12기는 현재 모두 비지정 문화재이며, 보호 시설이나 안내 표지판은 없다.
[의의와 평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원당리 산1 문소루 주변에 12기의 현령 군수 공적비를 모아 두어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있어 연구자들의 자료 수집이나 향토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비석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 1633년이며, 가장 늦은 것이 1903년이다. 세기별로는 17세기 2기, 18세기 2기, 19세기 6기, 20세기 1기이다. 의성군 관내 다른 곳의 수령 공덕비의 경우 대개가 19세기에 세워진 것에 반해 원당리 비석 떼는 건립 연대가 오래 되어 자료적 가치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선정비의 수에 있어서 특히 19세기의 것이 많이 현전하고 있는데 선정비의 건립이 곧 선정의 증거라고 볼 수는 없다. 이는 오히려 구한말의 혼란한 정세를 역설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