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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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士元 |
이칭/별칭 | 경인(景仁),만취당(晩翠堂),퇴계 문인,월란 정사,후산 정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용만 |
출생 시기/일시 | 1539년 - 김사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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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01년 - 김사원 사망 |
활동지 | 김사원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퇴계 문인 |
[정의]
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인(景仁), 호는 만취당(晩翠堂). 연산군 때 이름난 선비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의 증손이다. 아버지는 김세우(金世佑)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 金氏)로 김만겸(金萬謙)의 딸이다. 서애 유성룡의 외종질(外從姪)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가운데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활동 사항]
김사원(金士元)[1539~1601]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折衝將軍 龍驤衛 副護軍)의 벼슬을 지냈으며, 도산구곡 중 제2곡으로 알려진 월란 정사(月瀾 精舍)는 그가 강학하던 곳으로 지금도 그 자손과 후학들이 보존 관리하고 있다. 천성이 후덕하고 돈독하여 원근에 명성이 자자했다. 이로 인해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인 정제장(整齊將)으로 추대되었으며, 두 동생 김사형(金士亨)과 김사정(金士貞)을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보내 창의(倡義)하도록 했다.
특히 사친(事親)에 효도를 다하였으며, 기민을 구휼함에 전곡(錢穀)을 아끼지 않고 원근의 어려운 이를 많이 도왔으므로 그의 집은 김씨 의창(金氏 義倉)으로 불려졌다. 그 외에도 남을 구휼한 사례가 많아 오늘날까지 일화로 전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상훈과 추모]
죽은 지 100여 년 뒤, 후산 정사(後山 精舍)에 제향(祭享)하였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행장(行狀)을 짓고, 번암(樊岩) 채제공(蔡濟恭)이 묘갈(墓碣)을 썼다.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에 있던 후산사는 1747년(영조 23)에 김사원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으로, 1759년 정사의 북편에 사당을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1767년(영조 43) 현 위치로 이건하고 사림의 공의로 봉안 의절을 마쳤다. 흥선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91년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또한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에는 김사원이 건립한 의성 만취당이 남아 있다. 의성 만취당은 원래 안동 김씨 종실(宗室)로 사용하기 위한 대청(大廳)으로 건립하였으나, 거실(居室)로 사용하기 위해 1727년 복재(復齋)를 증축하였으며, 1764년에는 서소익실(西小翼室)을 증축하여 현재와 같은 평면을 이루게 되었다. 1983년 6월 2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오다가 2014년 6월 5일 보물 제182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