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4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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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백지국 |
[정의]
1392년부터 1863년까지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 시대 의성 지역은 의성현(義城縣), 비안현(比安縣)을 비롯하여 상주목(尙州牧)의 속현인 단밀현(丹密縣), 보주(甫州)[예천(醴泉)]의 속현인 다인현(多仁縣), 용궁현(龍宮縣)의 일부분[현재 안사면 지역]에 해당한다.
[행정 구역의 변천]
조선은 건국 후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 주(州)·부(府)·군(郡)·현(縣)을 두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군현 관내의 하부 행정 구역으로는 면(面)[방(坊)·사(社)] 또는 그 밑에 리(里)·동(洞)이 있었다.
의성현은 고려 시대 현령(縣令)과 감무(監務)가 두어지는 등 몇 차례 읍격의 변천을 겪었으나, 고려 말부터는 현령이 지속적으로 파견되며 읍격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하부 행정 구역은 면리제(面里制)가 실시되면서 변화를 겪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의성현은 사곡면(舍谷面)·옥산면(玉山面)·금뢰면(金磊面)·하천면(下川面)·석전면(石田面)·남부면(南部面)·상천면(上川面)·산운면(山雲面)·가음면(佳音面)·북부면(北部面)·단촌면(丹村面)·구산면(龜山面)·점곡면(點谷面)·빙산면(氷山面)·소야면(巢野面)·안평면(安平面)·우곡면(羽谷面)·소문면(召文面)·억곡면(億谷面) 등 19개의 면으로 개편되었다.
비안현은 고려 말 비옥현(比屋縣)과 안정현(安定縣)의 통합으로 이루어졌다. 1390년(공양왕 2) 안정현에 감무가 설치될 때, 비옥현을 병합하였다. 1421년(세종 3) 안정현의 명칭은 안비(安比)로 변경되었으나, 지방민들의 반대로 1423년(세종 5) 재차 이름을 비안(比安)으로 바꾸고 안정현 지역에 있던 치소(治所)를 비옥으로 옮겼다. 이후 안정현은 비안현의 속현으로 존속하다가 16세기 중엽 이후 직촌(直村)이 되었으며 면리제가 실시되면서 다시 개편되었다. 『여지도서』에는 비안의 하부 행정 구역으로 읍내면(邑內面)·신동면(身東面)·외북면(外北面)·내북면(內北面)·내서면(內西面)·외서면(外西面)·정동면(定東面)·정북면(定北面)·정서면(定西面) 등 9개의 면이 기재되어 있다. 한편, 두입지(斗入地)로 용궁현의 신하면(申下面)[안사면 서부]이 낙동강 남쪽으로 길게 늘어져 비안현에 깊이 들어와 있었다.
단밀현은 1018년(현종 9) 상주에 내속된 이래, 조선 시대 전 기간 상주의 속현으로 존속하였다. 면리제가 실시되면서 상주목의 단동면(丹東面)·단북면(丹北面)·단남면(丹南面)·단서면(丹西面) 등 4개의 면으로 개편되었다.
다인현은 1274년(원종 15) 보주(甫州)[예천(醴泉)]로 이속된 이래, 조선 시대 전 기간 예천의 속현으로 존속하였다. 면리제가 실시되면서 1599년(선조 32) 예천군의 현동면(縣東面)·현서면(縣西面)·현남면(縣南面)·현내면(縣內面) 등 4개면으로 개편되었다.
[행정 기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보면 의성현의 관원(官員)으로 현령(縣令)·훈도(訓導) 각 1인이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 의성현 관직(官職) 항목을 보면 “현령(縣令) 문음(文蔭) 5품이다.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60명, 인리(人吏) 114명, 지인(知印) 40명, 사령(使令) 26명, 관노(官奴) 67구, 관비(官婢) 61구”로 기록되어 있다.
비안현의 경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감(縣監)·훈도(訓導) 각 1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 비안현 관직 항목을 보면 “현감 음관(蔭官) 6품이다.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30명, 인리 44명, 지인 31명, 사령 12명, 관노 31구, 관비 31구”로 기록되어 있다. 의성현과 비안현의 읍격은 현(縣)으로 동일하나 파견되었던 관리의 품계나, 배치되었던 인원 수 등으로 보아 의성현의 읍세가 컸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95년 편찬된 『영남읍지(嶺南邑誌)』에 수록되어 있는 의성현지(義城縣誌) 사례(事例) 항목에 기록된 의성현의 행정 기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령 아래 향교(鄕校)·향청(鄕廳)과 호장(戶長)이 있으며, 호장 아래 육방(六房)인 이방(吏房)·호방(戶房)·예방(禮房)·병방(兵房)·형방(刑房)·공방(工房)이 있었다. 그 밖의 기구로 무청(武廳)인 강무당(講武堂)·기고청(旗鼓廳)·군관청(軍官廳)·친병청(親兵廳)·선무청(選武廳)이 있었다. 향청은 6방을 기찰하는데 좌수는 이방과 병방을, 좌별감은 호방과 예방, 우별감은 형방과 공방을 맡았다.
[호구와 전결]
조선 시대는 인구와 토지를 바탕으로 세금을 거두어 재정을 확충하였다. 국가 입장에서는 각 지역의 호구와 전결 수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 편찬된 각 종 관찬 읍지에는 호구와 전결을 조사한 결과가 수록되어 있다. 먼저 조선 시대 의성현, 비안현, 단밀현, 다인현의 호구 관련 기록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경상도 지리지(慶尙道 地理志)』와 『여지도서』에 기록된 의성 지역 호구 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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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지리지』를 보면 조선 초 의성군 호수는 의성현이 637호로 가장 규모가 컸다. 그 뒤로 비안현의 463호, 다인현의 311호, 단밀현의 140호 순이다. 『여지도서』를 보면 조선 후기 의성 지역의 호구 수는 의성현이 8,012호, 비안현이 3,057호로 『경상도 지리지』 때보다 각각 약 13배, 약 6.5배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속현으로 존속하였던 단밀현과 다인현의 경우 주읍인 상주와 예천에 포함되어 비교할 수 없다.
조선 시대 의성 지역의 전결 수는 『세종실록지리지』와 『여지도서』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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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에 비해 『여지도서』의 전결 수가 소폭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의성 지역의 인구는 조선 전기에 비해 조선 후기에 대폭 상승하였고, 전결은 조선 전기와 후기에 큰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조선 전기에 비해 소폭 증가한 전결 수로 크게 늘어난 인구를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농업 기술의 발달로 전결 당 농업 생산량이 증대하였기 때문이다.
[의성 지역 재지 사족]
의성현의 대표적인 재지 사족은 토성에서 성장한 의성 김씨를 비롯하여 타읍에서 이주한 안동 권씨(安東 權氏), 아주 신씨(鵝州 申氏), 안동 김씨(安東 金氏), 영천 이씨(永川 李氏), 영양 남씨(英陽 南氏) 등이 있다. 비안현의 대표적인 재지 사족은 비안 박씨(比安 朴氏)이다. 단밀현의 경우 기존의 토성이 여말 선초에 사족과 이족으로 분화되고, 조선 중기 사화와 임진왜란 등을 겪으며 이주 토성으로 향촌 지배 세력이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다인현 역시 기존의 토성은 여말 선초 사족과 이족으로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선 후기의 기록에 이주 토성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새로 유입된 토성보다는 주읍인 예천의 재지 사족들이 이곳의 재지 사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의성현·비안현·단밀현·다인현 등은 안동이나 상주 등 주변 지역의 유력한 재지 사족들과 혼인 관계 및 사제 관계를 맺으며 향촌 지배 세력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의성현의 경우 많은 문무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영남 지역에서 높은 입지를 차지하였다.
의성 지역 재지 사족들의 활동 기구로 향교를 비롯한 서원(書院)들이 지역 곳곳에 건립되었다. 의성 지역에 건립된 향교로는 의성현의 의성 향교(義城 鄕校)와 비안현의 비안 향교(比安 鄕校) 등이 있다. 또한 조선 시대 의성 지역에 세워진 서원으로는 의성현 지역에 빙계 서원(氷溪 書院)·장대 서원(藏臺 書院)·학산 서원(鶴山 書院)·금산 서원(錦山 書院)·매강 서원(梅岡 書院)·명곡 서원(明谷 書院)·화산 서원(禾山 書院)·단구 서원(丹邱 書院) 등 8개소가 있었고, 비안현 지역에 이곡 서원(尼谷 書院)·구천 서원(龜川 書院)·백천 서원(白川 書院)·병호 서원(屛湖 書院) 등 4개소, 단밀현 지역에 속수 서원(涑水 書院) 1개소 등 총 13개소의 서원이 있었다. 이들 서원은 모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는데, 2012년 현재 8개소만이 복설되어 있다.
[조선 시대 의병 활동]
의성 지역의 의병 활동은 크게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하였을 때 전개되었던 의병 활동과 1862년 임술민란(壬戌民亂) 때의 의병 활동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의성 김씨(義城 金氏)·아주 신씨(鵝洲 申氏)·영천 이씨(永川 李氏) 등 지역의 재지 사족들이 주체가 되어 전개한 의병 활동으로, 이들의 창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후자는 지배층의 수탈과 억압에 대한 저항과 불만으로 봉기한 농민 항쟁으로 특히 비안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주요 사건]
조선 시대 의성 지역에서 발생한 주목할 만한 일로 ‘의성 향교 대성 위판 도난 사건(義城鄕校大聖位版盜難事件)’과 ‘김복원(金復元)의 의거’ 등이 있다. ‘의성 향교 대성 위판 도난 사건’ 은 1603년 의성 향교에서 발생한 위판 도난 및 훼손 사건으로 범인은 향리(鄕吏) 김건상(金乾祥)으로 밝혀졌다. 유교 국가에서 지방 교화의 핵심이던 향교의 문묘가 훼손된 이 일은 당시 큰 사건으로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이 일로 현령 장현광(張顯光)은 문책을 받고 면직되었다.
‘김복원의 의거’는 정조(正祖)의 아버지인 장헌 세자(莊獻 世子)[사도 세자(思悼 世子)]의 죽음과 관련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김복원은 광산 김씨(光山 金氏)로 1740년(영조 16) 증광 무과에 급제하였다.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로 재직할 당시 임금에게 백성의 질고를 적나라하게 고하였고, 진법을 어전에서 설명하여 크게 신임을 받았다. 인동과 거제에서 부사직을 차례로 지내고 장헌 세자의 변고가 있던 해 봄 대구로 전직되었다.
장헌 세자는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로 정쟁에 의해 1762년(영조 38)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하였다. 장헌 세자의 죽음을 접한 김복원은 경상도 감영(慶尙道監營) 제승당(制勝堂)에서 곡례를 감행하였다. 김복원의 행동은 당시 상황으로는 멸문의 화를 당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신고를 접한 관찰사 황인검(黃仁儉)은 김복원의 충의를 생각하여 사건을 묵인해 주었다. 김복원은 관직을 버리고 초야로 돌아와 은거하였는데, 뒤에 영조가 장헌 세자에게 사도(思悼)라 시호(諡號)를 내릴 때 김복원에게 안동 영장(安東 營將)의 관직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초야에서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