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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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고대에서부터 현재까지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의 역사.
[고대]
의성 지역은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하여 청동기 시대에 삼한의 소국이 이곳에 성립되었다. 삼한의 소국 가운데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단밀면]·여담국(如湛國)[금성면 탑리리], 조문국[금성면] 등이 의성 지역에 존재하였다고 비정되고 있다.
185년(신라 벌휴이사금 2)에 조문국을 정벌한 신라는 조문군(召文郡)을 설치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난 후 행정 구역을 개편한 757년(경덕왕 16) 문소군(聞韶郡)이라 개칭하고 진보현(眞寶縣)·비옥현(比屋縣)·안현현(安賢縣)·단밀현(丹密縣)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고려]
후삼국 시대에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일 때 의성 지역은 군사적으로 요충지에 해당하여 왕건과 견훤이 호시탐탐 노리는 지역이었다. 의성의 호족 홍술(洪術)이 왕건에게 귀부하자 의성부(義城府)를 설치하여 우대하였다. 『경상도 지리지』에 의하면 의성부는 태조 때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 기록에 의성부에 관한 기록이 929년(태조 12)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929년 이전에 의성부가 설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의성부로 승격되면서 일계현(日谿縣)·고구현(高邱縣)을 합병해 의성부의 영역은 대폭 늘어났다.
1018년(현종 9)에 의성부는 의성현이 되어 경상북도 안동인 길주(吉州)의 속읍이 되었다. 주읍은 수령이 파견되는데 반해 속읍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음으로써 주읍인 길주의 행정적 지배를 받았다. 이때 현재의 의성군에 속하는 비옥현과 단밀현, 안정현은 신라 경덕왕 때 의성, 즉 문소현의 영현이었지만 상주목의 속읍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고려 시대에는 의성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 의성현에는 피촌향(皮村鄕)과 골라소(骨羅所), 신촌 부곡(新村部曲)·굴어곡 부곡(屈於谷部曲)·우곡 부곡(牛谷部曲) 등의 부곡제 영역이 존재하였다.
의성현은 1143년(인종 21)에 주읍으로 승격되어 현령이 파견되었다. 그렇지만 무신 정권 성립 이후 경상도 지방은 1193년(명종 2) 남적(南賊)이라 불린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또 최충헌 정권 때 신라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의성현은 신종조에 신라 부흥 운동군에 함락되었기 때문에 감무로 강등되었다. 그 후 충렬왕 때 일시 대구에 병합되었지만 곧 현으로 복구되었다. 의성의 경우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을 두 차례나 겪었다.
[조선]
조선 시대에 오면 오늘의 의성군 영역에는 의성현과 안정현이 주현으로 있고, 비옥현은 안정현에, 단밀현은 상주목에, 다인현은 보주[지금의 경상북도 예천]의 속현으로 있었다.
비옥현은 1421년(세종 3) 안정현과 합쳐서 안비현(安比縣)으로 되었고, 1423년 비안현(比安縣)으로 개명되었다. 당시의 호구 수는,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의성현이 637호 4,102인, 의흥현이 424호 3,392인, 비안현이 463호 4,077인이었다.
조선 전기 이래 의성 지역에서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문풍을 떨쳤고, 임진왜란 때 김사원(金士元)·김해(金垓)·김치중(金致中)·권희순(勸希舜) 등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했으며, 정묘호란·병자호란 때에는 신적도(申適道)·권수경(權守經) 등이 역시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하였다.
[근대]
1895년 갑오개혁에 의해 전국이 23부로 편성되자 세 지역 모두 군으로 되어 대구부에 소속되었다가,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자 경상북도에 소속되어 의성군은 2등 군, 비안군·의흥군은 4등 군으로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비안군·의흥군은 의성군에 병합되어 오늘날의 의성군으로 발전되었으며, 1940년 의성면이 의성읍으로 승격되었다.
[인물들의 활동]
의성 지역은 후삼국 시대 홍유(洪儒)·김홍술(金洪術)의 출신지로서 지방 세력인 호족 세력이 강성한 곳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합에 일정한 지지와 협조를 보낸 지방 세력인 호족에게 공신을 책정하고, 성씨를 하사하여 본관제를 실시함으로써 의성 지역에도 토성(土姓)이 존재하게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의성현조에 의성의 토성은 김(金)·심(沈)·홍(洪)의 성씨가 등장한다. 홍유는 태조 왕건의 추대의 공로로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1등 공신으로 책정되었고, 그 딸이 태조 왕건의 부인인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 홍씨(洪氏)가 되어 의성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을 낳았다. 그렇지만 홍씨와 심씨는 후세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고 김씨만이 의성을 대표하는 대성으로 발전하여 고려 후기 이래 계속 상경종사하면서 고려 말 조선 초에는 기호 지방까지 분포되었고, 재지 세력도 사족과 이족으로 분화되어 사족은 영남 일원에 확산되어 갔다.
김씨로 중앙에 진출하여 내외 요직과 문한지임을 역임한 최초의 인물은 김훤(金暄)이었다. 그는 고려 원종 때 등제하여 정당문학과 찬성사를 역임한 신흥 사대부였기 때문에 의성 김씨의 활동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의성 김씨도 진출의 선후에 따라 크게 경파와 향파로 나누어진다. 김훤 계와 사림파의 대가인 김안국(金安國) 계는 전자에 속하고 영남 지방에 거주한 김성일(金誠一) 가문과 김우굉(金宇宏) 계는 후자에 속한다 하겠다. 김씨 가운데 김안국·김정국 형제를 중심으로 기호 지방에 거주한 일파도 있고, 좀 늦게 진출한 김성일 가문은 의성에서 안동으로 이주하였고, 또 다른 일파는 의성에서 성주와 상주 등 경상우도로 이주한 김우굉 가문이 있다. 경상좌도·경상우도에 분포되어 있는 김성일 가문과 김우굉 가문은 이황과 조식 문하를 출입하면서 대표적인 영남 사림파로 발전하였다. 의성은 안동과 인접하여 안동의 토성들이 많이 이주하였다.
의성 이족에는 토성 김씨 외에 촌성(村姓)인 정씨(丁氏)와 속성(續姓)인 오씨(吳氏)가 있고, 의성 호장으로 『해이록(解頤錄)』과 『정만록(征蠻錄)』을 편찬한 이탁영(李擢英)도 유력한 이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