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마산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460
한자 乾馬山戰鬪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백지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7월 1일연표보기 - 건마산 전투 발생
종결 시기/일시 1592년 7월 4일 - 건마산 전투 종결
발생|시작 장소 건마산 전투 발생지 -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산39지도보기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김응하|김응상|김응주|김치중|김치화|김치윤|김치홍|김치공|김치관

[정의]

임진왜란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건마산(乾馬山) 일대에서 벌어진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

[개설]

건마산은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에 위치한 산으로, 걸마산·부마산·성재 등으로도 불린다. 높이는 395m이며 단촌면 병방리점곡면 송내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2002년 출판된 『의성 지명 유래』에 따르면, 건마산에는 병방산성이 있다고 한다.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일본군은 빠르게 한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제1군은 중로(中路)[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충주-여주-양근-용진 나루-경성동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은 좌로(左路)[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조령-충주-죽산-용인-한강],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은 우로(右路)[김해-성주-무계-지례-등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로 나뉘어 북상하였다. 의성현(義城縣)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의 공격을 받았다.

[경과]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이 의성현을 공격하자 지역 곳곳에서 의병이 조직되었다. 의성군 점곡면 사촌 마을[사촌리]의 의성 김씨(義城 金氏) 가문에서는 김치중(金致中)[?~1592]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는데,건마산 전투(乾馬山 戰鬪)가 그것이다.

김치관(金致寬)[1569~1661]의 『역락재집(亦樂齋集)』「종형건마산사절시사(從兄乾馬山死節時事)」에는 김치중이 창의하여 건마산에서 순절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일본군 침략이 전해지자 김응하(金應夏), 김응상(金應商), 김응주(金應周)는 집안의 문을 걸어 잠그고 의(義)를 취하였고, 다른 일족들은 김응상의 아들인 김치중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김치중은 건마산에 진을 치고 동북쪽 강 건너 비대골[比大谷]에 수천 개의 허수아비를 병졸로 가장하여 세워 둔 뒤 유인하는 전략으로 일본군과 격돌하였다.

[결과]

김치중을 중심으로 항쟁한 건마산 전투는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수적 우위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패배로 끝났다. 김치중의 동생 김치화(金致和)와 김치윤(金致潤)을 비롯한 김응주(金應周)[김치관의 아버지], 김치홍(金致弘), 김치공(金致恭) 등이 차례로 전사하였고, 김치중은 건마산 벼랑 꼭대기로 올라가 자결했다고 한다.

그 밖에 김치중의 종제 김치강(金致剛)이 전사하자, 그의 처 권씨가 골짜기에 몸을 던져 죽고, 김치중의 처 신씨 또한 남편의 뜻을 이어 김치중이 자결한 곳으로 올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김치중의 노복 서석(徐石)과 신씨의 시비 복분(福分) 역시 주인을 따라 함께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 끝난 뒤 김치중 가문의 의병 활동과 삼강 정신이 조정에 알려져 1609년(광해군 1) 3월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각의 이름은 의열각(義烈閣)으로 현재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228-5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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