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3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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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地藏寺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안사면 월소1길 148[월소리 559]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조수동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637년 - 지장사 중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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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652년 - 지장사 극락전 중건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666년 - 지장사 영산전 중건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677년 - 지장사 청풍루 중건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680년 - 지장사 영산전 중건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765년 - 지장사 청풍루 중수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838년 - 지장사 법당, 누각 중건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847년 - 지장사 극락전 중수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861년 - 지장사 영각 건립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872년 - 지장사 응향각 중건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96년 - 지장사 명부전 건립 |
현 소재지 | 지장사 - 경상북도 의성군 안사면 월소리 559 |
성격 | 사찰 |
창건자 | 의상 대사 |
전화 | 054-862-1049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안사면 월소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 소속 사찰.
[건립 경위 및 변천]
지장사(地藏寺)는 7세기 경 의상 대사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극락전, 응진전, 의향각, 청풍루, 산신각, 칠성각, 일주문과 10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사찰이었다.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알려지지 않는다.
1637년(인조 15) 세완 대사가 중건하였고, 1652년(효종 3)에는 영인 대사가 극락전을 중창하였다. 1666년(헌종 7)에 영산전, 1677년(숙종 3)에는 청풍루가 중창되었고, 1680년에는 법선이 영산전을 중수했다. 1752년(영조 28) 희묵(熙默)이 영산전을 관음전이 있던 자리로 옮겨서 건축했고, 1765년에는 신열(神悅)이 청풍루를 중수하였다. 1838년(헌종 4) 성우(性宇)와 영일(永一) 등이 법당과 누각을 중수하였으며, 1847년 영송(影松)이 극락전을 중건하였다. 1861년(철종 12)에는 운악(雲岳)이 영각을 세웠고, 1872년(고종 9)에 혜운(惠雲)이 응향각을 중창하였다. 1996년에 명부전을 새로 지었다.
1722년(경종 2)에 용안(龍眼) 성징(性澄)이 작성한 상량문 「복장문(腹藏文)」에 의하면 그 해에 법선(法禪)[廣湜] 스님이 불화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과거에는 직지사의 말사였으나 현재는 고운사의 말사이다.
[활동 사항]
매월 음력 초하루에 정기 법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부처님 오신 날, 성도절, 우란분재일 등 불교 명절에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지장사에는 승려 2명과 신도 약 200명이 있으며, 신도회를 조직하여 신행과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사찰 경내에는 중앙에 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3층 석탑이 있고, 극락보전, 응진전, 비로전, 명부전이 일직선상에 건축되어 있다. 그리고 의향각, 청풍루, 명부전, 삼성각, 법당, 요사채, 선방, 찻방 등의 전각이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성적암과 도장암이 있다.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조선 후기 건축물이다. 불단 위에는 18세기 중반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 아미타 삼존 좌상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고, 옆 벽면에는 신중 탱화와 칠성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조선 후기 건축물로 내부에는 석가여래 좌상과 4대 보살, 16나한상이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고, 삼성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 맞배지붕 건물이다. 한편, 비로전에는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관련 문화재]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176호 의성 월소동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義城 月沼洞 石造 毘盧舍那佛 坐像)이 지장사 비로전에 있는데, 의성군 안사면 월소리 쌍호 초등학교가 폐교되면서 옮겨온 것이다. 그 밖의 문화재로는 숙종 친필의 지장사 현판이 있으며, 1715년(숙종 41)에 어각과 하마비(下馬碑)를 세웠으나 지금은 하마비만 남아 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명성 황후가 난을 피해 이곳에 와서 축원문을 남겨 1970년대까지 있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