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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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檜巖寺址 出土 靑銅制 金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3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동규 |
출토|발굴 시기/일시 | 1999년~2000년 - 양주 회암사지 2차 발굴 조사에서 출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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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용산동 6가 168-6] |
원소재지 | 양주 회암사지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3 |
출토|발견지 | 양주 회암사지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3 |
성격 | 금탁|풍경 |
재질 | 청동 |
크기(높이, 길이, 너비) | 약 31㎝[높이]|약 30㎝[직경]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국립중앙박물관 |
[정의]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양주 회암사지(楊州檜巖寺址) 보광전 터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청동제 금탁(琴鐸).
[개설]
금탁은 불구(佛具)의 하나로 보통 풍경(風磬) 또는 풍탁(風鐸)이라고 부르며, 경세(警世)의 의미를 지닌 도구로서 수행자의 방일(放逸)이나 나태함을 깨우치는 역할을 한다. 풍탁은 처마 끝에 매다는 작은 종으로, 속에는 붕어 모양의 쇳조각을 달아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 소리가 나게 한 것을 말한다. 풍경 역시 방울에 고기 모양의 얇은 금속판을 매달아 두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즉, 고기가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잠을 줄이고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회암사지 출토 청동제 금탁(檜巖寺址出土靑銅制金鐸)은 양주 회암사지 보광전 터 북동쪽 모서리와 북서쪽 모서리 아래 박석(薄石) 상부에서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출토 위치와 명문 내용으로 보아 건물 추녀 끝에 매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탁의 상단부에 15자, 하단부에 134자 등 총 149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회암사(檜巖寺)가 조선 왕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2단으로 구성된 본체에 이를 건물에 매달게 하는 연결부, 그리고 바람에 흔들려 소리가 나도록 하는 부속구로 이루어져 있다. 출토 당시 깨진 상태였는데, 이는 보광전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추녀 끝에 매달렸던 금탁이 건물 붕괴와 함께 손상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탁의 크기는 직경 약 30㎝, 본체 높이 약 23㎝, 전체 높이 약 31㎝이다.
2단으로 된 본체의 상단에는 ‘왕사 묘엄존자 조선국왕 왕현비 세자(王師妙嚴尊者朝鮮國王王顯妃世子)’ 순으로 우에서 좌로 15자의 명문이 음각으로 종서(縱書)되어 있으며, 하단에는 모두 131자의 명문이 음각으로 4자씩 우에서 좌로 종서되어 있다. 하단의 명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天寶山中檜岩寺普光明殿四校角金粧碧彩勝天宮願縣琴鐸供諸佛亦使微塵諸衆生聞聲皆悟本心佛願我承此妙良緣朝鮮之号傳萬歲于戈永息國民安畢竟同緣歸覺際-洪武二十七年甲戌六(천보산중회암사보광명전사교각금장벽채승천궁원현금탁공제불역사미진제중생 문성개오본심불원아승차묘량연조선지호전만세우과영식국민안필경동연귀각제-홍무이십칠년갑술륙)[천보산에 있는 회암사 보광전 네 모퉁이는 금벽으로 화려하게 꾸미어 천궁보다 훌륭해 금탁을 달아 놓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 바라네. 또한 작은 티끌 같은 중생들이 그 소리를 듣고 부처님의 본심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가 이 신묘하고 아름다운 연기를 받들어 조선의 국호가 만세에 전해지도록 하소서. 전쟁[于戈]이 영원히 그쳐서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고 마침내 같은 인연의 깨달음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홍무 27년[1394] 갑술 6월]’
‘功德主嘉靖大夫判內侍府事李得芬施主貞信宅主許妙淨咸陽郡夫人朴妙湛寧順宅主朴氏 鉿[?]城翁主尹氏檢校門下侍中李崇(공덕주 가정대부 판내시부사 이득분 시주 정신택주 허묘정 함양군부인 박묘담 영순택주 박씨 협성옹주 윤씨 검교문하시중 이숭)’
명문 내용으로 볼 때, 1394년(태조 3) 6월에 공덕주 판내시부사 이득분(李得芬)의 발원문으로 검교문하시중 이숭(李崇)을 포함해 모두 5명의 시주자 이름이 확인된다.
[특징]
풍탁·풍경의 일반적인 용도와 같이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풍탁에 비해 크기가 크고 형태상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풍탁이 큰 것은 20㎝가 넘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 10㎝ 내외의 소형인 것에 비해, 회암사지 출토 청동제 금탁은 종구의 외경이 31㎝로 크다. 탁신의 높이 또한 일반적인 다른 풍탁들에 비해 높고, 두께도 부위별로 차이가 있지만 최대 0.8㎝로 매우 두꺼운 편이다.
[의의와 평가]
회암사지 출토 청동제 금탁은 금탁에 새겨져 있는 ‘회암사’라는 명문을 통해 회암사가 실제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최초의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조선 국왕(朝鮮國王)’, ‘왕현비(王顯妃)’, ‘세자(世子)’라는 명문은 회암사가 조선 왕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시주자인 이득분이라는 인물을 통해 조선 국왕이 태조 이성계(李成桂)이며, 왕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 세자는 이방석(李芳碩)임을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