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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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州檜巖寺址無學大師塔 |
이칭/별칭 | 무학대사 홍융탑,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 홍융탑,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탑과 부도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8-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서지민 |
건립 시기/일시 | 1407년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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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327년 - 무학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405년 - 무학 사망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9월 2일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보물 제388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보물 재지정 |
현 소재지 | 회암사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8-1 |
성격 | 부도 |
관련 인물 | 무학대사(無學大師) |
재질 | 석재[화강암] |
크기(높이) | 2.7m |
소유자 | 회암사 |
관리자 | 회암사 |
문화재 지정 번호 | 보물 |
[정의]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회암사(檜巖寺)에 있는 조선 전기 승려 무학대사(無學大師)의 부도.
[개설]
무학(無學)[1327~1405]은 삼기(三岐)[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속성은 박씨(朴氏)이고, 휘는 자초(自初), 당호(堂號)는 계월헌(溪月軒)이다. 1344년(충혜왕 복위 5) 18세에 출가하여,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불법을 배웠고, 1346년(충목왕 2) 부도암에 머물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진주 길상사(吉祥寺)와 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경(燕京)으로 가서 원에 와 있던 지공(指空)과 나옹(儺翁)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공민왕 5) 귀국하여 나옹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우왕 2) 나옹이 회암사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열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392년(태조 1)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회암사에서 거처하였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을 오가며 지상(地相)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도움을 주었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1405년(태종 5) 입적하였다.
[건립 경위]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楊州檜巖寺址無學大師塔)과 함께 서 있는 무학대사 비(無學大師碑)의 기록에 따르면, 무학이 입적한 지 2년 만인 1407년(태종 7) 조선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고승 무학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부도가 건립되었다.
[위치]
회암사의 북동쪽 능선 위에 지공선사 부도(指空禪師浮屠), 나옹선사 부도(儺翁禪師浮屠)와 함께 일직선으로 나란히 서 있다. 앞에는 무학대사의 업적을 새긴 무학대사 비가 서 있다. 능선 앞쪽으로 펼쳐진 울창한 숲과 양주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이다.
[형태]
높이는 약 2.7m로, 장대석(長臺石)을 2단으로 쌓아 높고 널찍하게 전체 8각을 이루는 석단(石壇)을 마련하였다. 석단의 각 모서리에는 정상부를 보주 모양으로 장식한 네모난 돌기둥을 세운 뒤, 그 기둥과 기둥 사이에 넓은 장대석을 끼워 넣었다. 난간을 둘렀는데, 이것은 석단 중앙에 위치하는 탑을 보호하는 일종의 장식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기본적으로 팔각원당형의 부도를 중심에 세우고 그 주변에 석단을 마련하는 것은 이전 시기에 볼 수 없는 새로운 형식이다.
부도의 가장 아랫부분인 지대석은 1장의 8각 석재로 각 면에는 구름무늬를 굵은 선으로 조각하였는데, 각 모서리의 구름무늬가 유난히도 크게 장식되었다. 상대·중대·하대로 구성된 기단부 중 하대석은 겹연꽃무늬가 귀꽃과 함께 화려하게 덮여 조각되었으며, 그 위의 8각 중대석은 모를 죽여 둥글게 배가 부른 형태로 다듬었다.
중대석의 각 면에는 내부에 모서리가 안쪽으로 접힌 네모꼴의 안상을 조각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꽃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연꽃 받침과 8각 받침석으로 이루어진 상대석은 연꽃무늬가 하대석과 같지만 귀꽃 장식이 없다. 앙련 위의 8각 받침석의 각 옆면에는 네모꼴의 구획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 당초(唐草) 넝쿨무늬를 가득히 새겼다. 괴임돌 없이 윗면이 평편하게 처리된 상대석 위의 탑신은 구형(求型)으로, 표면에는 운룡(雲龍) 무늬가 가득 조각되어 있다. 특히 용의 머리, 몸체, 비늘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있으며, 뒤엉킨 용의 몸체 사이에 구름무늬를 빈틈없이 빼곡하게 조각하여 구름 속을 날고 있는 용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용과 구름무늬가 조화를 이루어 상서로운 기운을 한층 더해 준다.
옥개석은 평박한 편이지만 모서리가 약간 추켜올라 가도록 추녀 끝의 모양을 내서 둔중함이 다소 감소된다. 비교적 가파른 경사를 이루는 낙수 면[지붕 위에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경사진 면]에는 우동[낙수면과 낙수면이 서로 만나는 경계 지점에 형성되는 각(角) 지점]이 굵게 내려와 처마 끝에 이르는데, 우동의 끝 부분에는 용머리를 양각하여 변화를 주고 있다. 상륜부는 지붕 꼭대기에 구멍을 뚫고서 보주만을 얹어 간소화하였는데, 보주 아래에는 2단의 둥근 원좌(圓座)를 마련하였다.
[현황]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은 1963년 9월 2일 보물 제38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은 조선 전기 부도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지공선사 부도 및 나옹선사 부도와 같은 구형 부도 형식의 예에 속하지만, 8각의 석단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부도를 봉안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표면에 새겨진 무늬의 조각수법도 매우 뛰어나서 조선 전기 석조 미술품을 대표하는 매우 뛰어난 수작이다.
한편 조선 시대에는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과 같이 8각의 석단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 부도 등의 예배 대상물을 봉안하는 경우가 불교 미술품에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조선 시대의 왕실과 관련되는 태묘(胎墓)나, 광해군의 만수무강(萬壽無疆)과 부처의 가호(加護)를 기원하는 목적으로 1620년(광해군 12)에 건립된 봉인사(奉印寺) 부도암(浮圖庵) 사리탑 등에도 응용되고 있어, 이 시기의 불교 미술이 왕실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 볼 수 있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크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