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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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 |
영어의미역 | Present Ag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승 |
[정의]
1945년 8월 15일부터 현재까지의 경상남도 양산시 역사.
[변천]
1945년 8월 18일 양산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그 산하 치안대는 양산경찰서를 접수하여 치안 확보에 주력하였다. 8월 22일 일본인 경찰서장 이와나가[岩永]는 치안대원을 감금하는 등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귀국을 걱정한 일본인들의 노력으로 한국인의 치안대는 양산경찰서를 재차 접수하여 자율적 치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우파의 중심 인물인 김철수와 안종석은 양산건국준비위원회와는 별도로 양산군 자치추진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양산건국준비위원회는 좌파 중심의 인민위원회와 우파 중심의 양산군 자치추진회로 분열하게 된다.
1945년 10월 11일 결성된 양산군 인민위원회는 10월 15일 경찰서 사무를 접수하고 행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10월 21일 미군이 양산에 진출하여 인민위원회 지도자를 체포하면서 주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은 약화된다. 하지만 미군정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읍외 지역에서는 양산군 인민위원회의 영향력이 여전히 작용하였다.
그 결과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이후 미군정의 좌익에 대한 탄압이 노골화되자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들이 1946년 10월 전국적으로 항쟁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10월 항쟁은 양산에서는 1946년 10월 8일 발생하였다. 이날 오후 1시 15분 양산시장에서 6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참여하여 식량 공출 반대와 양산군 인민위원회로 정권을 넘겨 줄 것을 주장하였다. 시위 군중은 곧장 양산경찰서로 이동하여 경찰을 구타하고 총을 탈취하면서 경찰서를 공격하였다.
이에 미군과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 군중들을 제압하자 다수의 사람들이 산으로 달아나 야산대로 활동하였다. 이들 야산대는 영축산과 신불산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군경과 우익 청년단원들의 토벌대에 의해 상당한 타격을 받았지만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재차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군경과 반공 청년 단체들의 많은 희생 끝에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야산대는 토벌되기에 이른다.
한편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관련자들 다수가 1950년 7월~9월 사이 검거되어 양산 인근 야산 곳곳에서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상적 문제와 관련이 없던 다수의 민간인들이 많은 해를 입었다. 양산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이 사배고개, 호포 야산, 양산 교리 춘추원 뒷산, 내원사 입구 등지에서 살해되었는데, 그 인원은 대략 1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4·19의거 이후 양산에서도 희생자유족회를 설립하여 712명의 유해를 수습해 양산 춘추원에 합동 묘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5·16군사 쿠데타로 진상규명위원회 관련자들과 유족들은 다시 오랜 동안의 침묵을 강요받는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전쟁이란 상황 속에서 자신이 어떤 이유에서 죽게 되었는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죽어갔다. 이들 민간인들의 살해에 대해 구체적 실상과 그 유족들에 대한 신원(伸寃)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