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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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집필자 | 이정수 |
[정의]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도 양산의 역사.
[개설]
경상남도 양산시는 산과 들이 좋고 문화 유적이 많으며, 고대로부터 불교 포교지로서 그 명성이 높았고,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던 곳이다.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쪽은 낙동강을 끼고 밀양시와 김해시, 동쪽과 남쪽으로는 부산광역시 기장군과 금정구에 각각 접하고 있다.
[고대]
경상남도 양산시는 하북정 고분군에서 출토된 타제석기 유물로 보아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석기 및 청동기 유적으로는 양산시 다방동에 있는 패총이나 양산 신기리 지석묘·북정리 고인돌군·하북정 고분군 유구 하층의 부패토층에서 출토된 무문토기·평산리 주거 유적 등이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의하면, 삼한(三韓)의 변진(弁辰) 지역이다. 독로국(瀆盧國)이 있었다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1~4세기경 양산은 김해를 중심으로 형성된 가야 지역 연맹체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초기에는 마두(馬頭)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77년(탈해왕 21)과 115년(지마왕 4)에 신라와 가야가 황산나루에서 전투하였다. 417년(눌지왕 1)에 박제상(朴堤上)이 삽량주간(歃良州干)을 맡고 있었다는 기록과 463년(자비왕 6)에 왜가 삽량성을 침략하였다가 대패를 당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신라 초기에 양산의 옛 이름이 삽량임을 알 수 있다.
665년(문무왕 5)에 그 영역을 확대하여 9주 중의 하나인 삽량주에 치소를 둔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그 뒤 757년(경덕왕 16)에 전국적으로 군현 명칭이 개편될 때 삽량주를 양주(良州)로 개칭하고 1소경, 12군, 34현, 4정으로 개편하였다. 삼국 통일 이래 양산 지역은 제철업의 중요한 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양산은 현 물금 지역 배후에 위치하는 황산[오봉산]을 채광지로 삼고, 여기에서 운반해 온 철광석을 파쇄하고 선광·제련·정련하여 1차 생산된 철괴는 낙동강이나 양산 단층 지대를 따라 개설된 도로를 이용하여 내륙 지방까지 공급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에 양주를 양주(梁州)로 개칭하였으며, 983년(성종 2)에 지방행정 구역 개편으로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되었다. 1018년(현종 9)에 경주목(慶州牧) 관하(管下)의 방어군(防禦郡)으로 방어사(防禦使)를 두고, 동평·기장현을 속현으로 하였다. 1301년(충렬왕 27)에 밀성군(密城郡)[지금의 밀양시]에 병합되었다가 1304년에 양주군으로 복구되었다. 군명의 별호로 의춘(宜春), 순정(順正)이라고도 칭했다.
신라 말 고려 초 사회 변동기에 양주에서는 김인훈(金忍訓)이 일정한 군사적 기반을 가진 중소 호족 세력이었다. 후삼국 전쟁기에도 큰 정치적 역할을 하여 양주의 토성 집단으로서 대표적인 지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양산김씨의 지방 세력들은 이러한 토착적 기반을 배경으로 고려 전기에 정치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 수공업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소(所) 수공업제도이다. 소의 물품 생산은 군현에 의해 관리되었고 군현 지배 체제를 통해 수취되었다. 고려시대에 양산에는 어곡소(於谷所)가 있었는데, 여기서 죽전(竹箭)이 생산되었고, 통도사 소속의 다소(茶所), 금음산리(今音山里)의 자기소(磁器所)에서 자기 등의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였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 양주군에서 양산군(梁山郡)으로 개칭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투중 군수 조영규(趙英圭)가 전사하였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저항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동래부(東萊府)에 편입되었다가 1603년(선조 36)에 복구되었다. 이때 병사(兵事)는 경주진(慶州鎭)으로 이관되어 행정과 병사가 분리되었다. 그 뒤 1643년(인조 21)에 동래 금정산성을 축조한 뒤에 병사는 다시 동래부(東萊府)로 이관되었다.
1897년(고종 34) 전국 행정 구역 개편에 의하여 읍내(邑內)·동(東)·상서(上西)·하서(下西)·상북(上北)·하북(下北)·구포(龜浦)·대저(大猪)의 8개 면을 관할해 오다, 1906년에 구포와 대저면을 동래군과 김해군에 넘겨주는 동시에 울산군의 외남면(外南面)과 웅상면(熊上面)을 편입하였으며, 1910년 외남면을 울산군에 환부하였다.
양산 지역에서는 낙동강 수운이 중요한 운송 수단이 되면서 순조로운 수운과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가야진사(伽倻津祠)는 삼국시대부터 있던 사당인데 조선시대, 특히 17세기 이후 여러 차례 앙산군수에 의해 중수되었다. 낙동강 수운에 대한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수로와 육로로 운송되어 와서 양산의 장시에서 거래된 물품은 쌀·콩·보리·면포·마포·명주·연초·어염·과일 등이다.
[근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읍내·동·상서·하서·상북·하북·웅상의 7개 면 58개 마을로 개편되었다. 1918년 읍내면이 양산면으로 개칭되었다. 1936년 상서면이 물금면으로, 하서면이 원동면으로 개칭되었다. 양산의 인물로는 윤현진(尹顯振)이 상해임시정부 재정차장이 되었고, 서병희(徐炳熙)가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독립운동으로는 1919년 신평과 양산에서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이 있었고 1930년 양산경찰서를 습격한 양산농민조합 사건이 있었다.
일제시대 양산은 군내 주요 도시 인구 밀집도에서 동래보다는 떨어지지만 밀양이나 울산 보다는 높게 나타난다. 또 상대적으로 도시는 번성했지만 대부분 일본인들이 거주한 동래의 온천장이나 장생포 같은 곳은 도시적 번성과 관계없이 조선인들의 거주수가 현저하게 낮았다. 양산에서 농경지 확대와 그것에 따른 지주 소작 관계의 변화에 큰 계기를 마련한 것은 1922년 양산수리조합이 설치되면서 부터였다.
1926년 양산면·동면·물금면 사이에 흐르는 양산천을 끼고 1,170정보의 저습지가 옥토로 바뀌면서 새로운 지주 소작 관계를 가져왔다. 이 저습지를 메기들이 노는 곳이라 메기들이라고 불렀는데, 메기들 농경지 가운데 한국인 813명이 542.69정보를, 일본인 76명이 530.38정보를 각각 소유했다. 1920년대를 거치면서 개간된 메기들의 지주 소작 관계는 1929년 대공황으로 경제적 불황이 닥치면서 1930년대 양산 지역 농민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현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민간인 출신 초대군수 지영진이 선출되었고, 1973년 동래군(기장·장안·일광·정관·철마·서생)이 양산에 병합되었다. 1979년에 양산면을 양산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80년에는 기장면을 기장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서생면이 울산군으로 편입되었으며, 같은 해 물금면 교리·유산·대동·화룡·용선 5개 마을을 양산읍으로 편입하였다.
1985년 장안면을 장안읍으로 승격하여 3읍 9개 면 120개 리가 되고, 1986년 동부출장소를 설치하여 기장·장안·일광·정관·철마면을 관할케 하였고, 1991년 웅상면을 웅상읍으로 승격하여, 4읍 8면 1출장소로 되었다. 1995년 양산군 동부출장소와 2읍 3면이 부산시로 편입되어 기장군이 되었다.
1996년 양산군이 양산시로 승격되면서, 물금면이 물금읍으로 승격되고 양산읍이 중앙동·삼성동·강서동으로 분동되었으며 2007년 4월 1일 웅상출장소를 설치하고 웅상읍을 서창동·소주동·평산동·덕계동으로 분동하여 1출장소 1읍 4면 8동으로 인구 26만이 넘는 도시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메기들이 신도시로 조성되고, 부산대학교 일부가 유치되고, 전철이 건설되어 문화·교육·교통이 고루 발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