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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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의미역 | Goryeo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채상식 |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경상남도 양산 지역의 역사.
[개설]
양산의 고려시대 지명은 양주인데, 김인훈 등의 호족 세력이 태조의 후삼국 통일에 적극 동조한 이후 지역 행정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아울러 양주에는 울주와 함께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는데, 이는 양주가 군사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 지역임을 말해준다. 일시적으로 동래현과 기장현을 속현으로 관할하기도 하고, 이들을 울주로 이속시키면서 동평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기도 하였다. 원나라의 간섭기에 수년간 밀성에 통합된 적도 있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변천]
고려시대의 양산은 940년(태조 23) ‘양주(良州)’에서 ‘양주(梁州)’로 군현의 명칭이 변경되었다. 즉, 통일신라시대의 양주(良州)라는 명칭은,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지만, 태조 때 일시적으로 중흥부(中興府)로 승격되었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인 940년에 양주(梁州)로 변경되었다. 그 뒤 1018년(현종 9)에 방어사가 설치되기도 하고 고려 후기 어느 시기에는 밀성(현 밀양)에 통합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1304년(충렬왕 30)에 다시 양주(梁州)로 환원되었다.
한편 양주와 의춘현(宜春縣)을 병칭하여 기록한 자료도 보이는데, 이는 양주의 별호가 의춘이었기 때문에 양주와 의춘현을 병칭하여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의춘이라는 별호는 991년(성종 10)에 유교적 체제 확립을 위해 중국 제도를 수용하면서 각 지방의 지명으로 제정된 일련의 조처에 의한 것이다.
태조 때 양주가 중흥부로 승격되었다는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후삼국 시기 양주는 인근 지역인 동래군의 정치적 노선과는 달리, 울주와 함께 친고려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 시기 고려는 일찍이 고려에 귀부하였던 각 지역 호족 세력에게 이들이 이전부터 관할해오던 지역을 보다 확대하여 부를 설치하였고, 이후 고려 사회에서는 중요한 주현으로서 역할을 담당케 하였다. 이에 비해 고려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던 지방의 경우에는 반대로 속현이나 부곡 등으로 전락시켜 통치하였다. 곧 고려의 건국에 공이 있는 인물이 배출된 지역은 주변 지역을 흡수·통합하여 승격시켰고, 그 지위가 격하된 지역은 강한 징벌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양주의 대표적인 호족은 김인훈(金忍訓)이다. 그는 903년 궁예에게 급히 구원을 청하게 되고, 이에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왕건을 도와 고려의 세력이 남부 지역까지 확대될 수 있도록 한 장본인으로 추측된다. 이에 따라 양주는 고려 건국 이후 ‘중흥부’로 승격되었다가, 940년 군현 개편 때 양주(梁州)로 개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양주는 인근의 군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고려 군현제는 1018년(현종 9)에 다시 개편되었다. 곧 4도호(都護), 8목(牧), 56지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 등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면서 양주에는 울주와 함께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는데, 이는 곧 고려 전기 양주가 군사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와 아울러 주·속현 관계를 정비하였다. 곧 고려 초부터 양주에 영속되었던 동래현과 기장현을 울주로 이속시키면서 동평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양주처럼 지방관이 파견된 지역, 곧 주현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군현인 속군·속현을 주현-속현의 관계로 거느리고 있었다. 고려의 지방 통치는 전국을 도, 경(京)·도호부(都護府)·목(牧)으로 대표되는 주목, 중앙에서 수령이 파견되어 지방행정을 이끌어가는 영군(주군), 영군에 영속되어 독자적 행정을 이끌어갈 수 없는 속군과 속현의 4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 전기의 도는 상급 행정기구로서의 기능을 갖지 못하였으므로, 지방 지배는 주목-영군-속현이라는 3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데 논란이 되는 것은 주목과 영군과의 관계이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주목의 영군에 대한 관할권은 극히 부분적이고 의례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오히려 영군은 중앙정부의 명령을 전달하거나, 조세·공부의 수취, 역역의 징발 등과 같은 주요 업무를 모두 중앙과 직접 연결하여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앙정부의 지방 지배와 통제는 지방관이 파견된 지역에 한정되었고, 속군현에 대해서는 간접 지배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곧 속군·속현에 존재하는 향리를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양주의 속현이었던 기장현·동래현·동평현의 경우에도 이 지역에 존재하는 향리를 통한 간접 지배방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향리들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이르기까지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였으나, 한편으로는 중앙의 새로운 세력으로 진출한 호족 세력에 편승하지 못한 채 각 지방에 남겨진 세력들이었다. 이들이 중앙의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문은 열려 있었으나,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시책도 함께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983년(성종 2)에 처음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향리 직제를 개편하기 시작했다. 곧 당대등(堂大等) 체제를 호장(戶長) 체제로 개편한 것이다. 이어 1018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향리의 정원을 정(丁)을 기준으로 주·부·군현의 대소에 따라 정하였다. 조선 초 양산군의 호구수가 425호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당시 양주의 향리는 5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면 양주의 향리층은 어떠한 집단이었을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양주에 의하면 ‘토성(土姓)이 7인데, 김(金)·이(李)·박(朴)·정(鄭)·한(韓)·방(房)·조(曺)이고, 투화성이 1인데, 진(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토착 성씨로서 향리층을 구성한 주요 가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고려시대 양주에 존재한 향·소·부곡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양산군조에는 자기소(磁器所) 하나가 군의 남쪽 금음산리(今音山里)에 있다고 기록한 반면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의 양산군 고적조에는 와곡(瓦谷)·범어(凡魚)·원포(源浦)·범곡(凡谷) 등의 부곡과 어곡소(於谷所) 등 5개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범어·원포·어곡소는 읍으로부터 각각 서쪽 6리·30리·6리에 있고, 와곡과 부곡은 읍으로부터 각각 북쪽 5리·10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서 원포부곡을 제외한 다른 곳은 읍에서 그렇게 먼 거리에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다만 어곡소의 위치는 현재의 물금면(勿禁面) 어곡리(魚谷里)와 동음을 가진 곳이어서 이곳으로 추정된다. 이들 부곡 지역은 『세종실록지리지』에 한 군데의 자기소 외에는 이미 소멸된 것으로 보아, 늦어도 조선 초기 이전에 소멸되어 일반 촌락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양주는 일시적으로 밀성(현 밀양)에 통합된 적이 있었다. 1301년(충렬왕 27) 5월의 조처였는데, 이는 원에서 파견된 평장정사(平章政事)인 활리길사(闊里吉思)가 지방관원의 축소를 통한 민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차원에서 군현 통합을 시도하면서 이루어진 조처였다. 그러나 3년 뒤에 양주는 여러 군현들과 함께 독립 군현으로 복구되었다. 이후 양주는 여러 차례에 걸친 군현 병합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독립적인 군현의 위치를 유지하였다.
고려 말에 이르러 왜구의 발호가 극심하였는데, 양주에도 기록상 공민왕 대에서 우왕 대에 걸쳐 6회의 왜구 침략이 있었다. 실제로 양주에 단 6회만 침입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고려 말에 왜구는 대마도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 노략질하기 때문에 주 침입로는 동래·양산·김해·울산 등을 비롯한 동남해 지역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양주는 지역적인 조건으로 보아 문헌 기록보다 훨씬 많은 왜구의 침입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