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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서사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400072
한자 外西社倉
영어음역 Oeseo-sacha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남도 양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윤용출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인 사창(社倉)의 하나.

[제정경위 및 목적]

우리나라에서 사창이 처음 실시된 때는 1451년(문종 1)이었다. 사창은 고려 시대부터 설치해온 의창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실시하였다. 즉, 원곡의 부족과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군자곡의 감소를 막자는 데 있었다. 농민에게 환곡 정책의 일환으로 대여했던 의창곡은 이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조 이후부터는 사창곡이 제대로 회수되지 못하고 관리들의 농간 등 많은 폐단이 생겨 1470년(성종 1)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사창제가 폐지된 이후 사창에 대응할 만한 대민 구휼기관이 없어, 16세기 이후 사창제의 부활 논의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과 토착 서리들의 반발로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고종 3)에 대원군 정권에 의해서 사창제가 다시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조두순이 마련한 「사창절목(社倉節目)」을 정부안으로 하여 경기·삼남·해서 등 5도에 실시했는데, 이를 사환제(社還制)라 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는 이것을 바탕으로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이 탁지부령 제3호로 「사환조례(社還條例)」를 제정해, 종래 환곡에서 취모보용(取耗補用, 축이 난 곡식을 가외로 더 걷어 들여서 부족한 씀씀이를 벌충하던 일) 기능을 없애고 진대 기능만으로 돌려 운영을 향촌민에게 맡겼다.

[내용]

경상남도 양산 지방의 외서사창은 내서사창(內西社倉)·상서사창(上西社倉)·하서사창(下西社倉)·동사창(東社倉)·북사창(北社倉) 등과 더불어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사환제(社還制)의 사환 창고이다. 종래의 환곡제와 달리 진휼을 대비하는 용도였고, 면리 단위로 민간에서 운영한다는 것을 큰 원칙으로 삼았다. 외서사창은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대리 배내마을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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