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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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山通度寺大雄殿-金剛戒壇 |
영어의미역 | Daeungjeon Hall and Stairs of Tongdo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통도사로 108]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조원영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7년 1월 1일 -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국보 제290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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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국보 재지정 |
성격 | 불전|석조 계단 |
양식 | 단층팔작지붕|석종형 부도 |
건립시기/일시 | 643년(선덕여왕 12) 건립 후 여러 차례 보수 |
정면칸수 | 측면칸수 |
소재지 주소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통도사로 108] |
소유자 | 통도사 |
문화재 지정 번호 | 국보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에 있는 대웅전과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신라시대 석조 계단.
[개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이곳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 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고 한다.
[변천]
신라 선덕여왕 때 초창(初創)된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45년(인조 23)에 중건하였다.
[형태]
통도사 대웅전은 상로전(上爐殿) 영역에 있는데, 건물 후면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있고 중앙뜰의 좌우에는 명부전, 응진전, 정면에는 일로향각이 마주 서 있다. 통도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단층팔작지붕 불전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다른 전각과는 달리 정면의 너비가 측면보다 좁은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이 전각 내에 부처를 모시지 않고, 건물 후면에 있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을 향하여 정면이 위치하면서, 한편 불이문(不二門)을 들어섰을 때 마주 보이는 측면에도 합각(合閣)을 만들어 양쪽을 다 강조한 특이한 구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건물의 지붕은 앞면을 향해 T자형을 이룬 독특한 평면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이유는 금강계단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석가모니의 신체를 모셔 놓고 석가모니를 모방한 불상을 따로 마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건물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한다.
이 건물은 각 면의 현판이 다르다는 특징이 있다. 금강계단을 직접 대하는 북쪽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적멸보궁(寂滅寶宮)’, 남쪽면에는 결코 깨어지지 않는 금강석처럼 계율을 지킨다는 뜻에서 ‘금강계단(金剛戒壇)’, 동쪽면에는 석가모니를 모신 불전이라는 뜻에서 ‘대웅전(大雄殿)’, 서쪽면에는 영원한 진리와 우주의 본체를 상징하는 법신불이 상주하는 도량이라는 의미에서 ‘대방광전(大方廣殿)’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건물의 동쪽면은 5칸이며 칸과 칸 사이의 간격은 모두 같다. 칸마다 분합문을 달았는데, 좌우 협칸과 퇴칸은 빗살창인 데 비해 어칸의 문은 격자빗살창에 사이사이 다양한 꽃장식을 붙여 대단히 화려하다. 건물의 중앙인 어칸의 위치에 계단이 놓이지 않고 오른쪽 협칸의 위치에 배치된 점이 특이하다.
건물의 남쪽면은 팔작지붕의 합각면이 드러난다. 3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칸마다 문을 달았는데 모두 빗살무늬창살이고, 좌우 협칸은 2분합문, 어칸은 더 넓어 4분합문을 달았다. 현판의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작품이다.
서쪽면은 바닥이 높아져 기단부 자체가 낮아 장식이나 계단은 없으며, 5칸이지만 금강계단 쪽의 두 칸은 문을 달지 않고 벽체로 마감하였다. 어칸과 좌측 협칸 및 퇴칸은 모두 2분합문을 달았는데, 어칸은 격자와 빗살무늬를 혼합하였고 나머지는 격자무늬로 장식하였다. 기단을 살펴보면 지대석(地臺石) 위에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세우고, 이 사이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 면석(面石)을 끼운 뒤 상부에 갑석(甲石)을 놓아 마무리한 가구식(架構式) 기단을 이루는데, 이 기단은 대웅전의 초창 때인 신라시대의 것이라 생각된다. 기단 면석뿐만 아니라 돌계단 층계석, 계단 양쪽 소맷돌부분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 받은 뛰어난 연꽃조각을 볼 수 있다.
기단 위에 놓은 초석 또한 일부는 주좌(柱座)를 쇠시리한 고격(古格)의 것이고, 일부는 막돌초석이며, 이 위에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상부는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이 위에 평방(平枋)을 놓아 공포(栱包)를 기둥 위에는 물론, 기둥 사이 평방 위에도 놓은 다포식(多包式)을 이루고 있다.
공포의 짜임은 외3출목(外三出目)·내4출목(內四出目)으로서 초제공(初諸貢)이나 2제공 위에 놓인 살미첨차[山彌首遮]의 끝은 강직한 앙서[仰舌]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교두형(翹頭形)으로 되어 건실한 짜임을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는 내부의 서쪽편 내진(內陣)에 고주(高柱)들을 세워, 이들 고주와 동측면의 평주 사이에 대들보[大樑]를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중종보[中宗樑]와 종보[宗樑]를 걸었다.
그러나 전면부터 제4주열에는 2개의 고주를 세워 고주 사이에 대들보를 걸었고, 또 제5주열에는 양측 모두 고주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후면 어간(御間) 기둥과 제4주열 고주간에 충량(衝樑)을 걸었다.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층급천장을 이루면서 우물천장으로 마무리하였다. 불이문 쪽과 금강계단을 향하여 이중으로 정면성을 주기 위하여 합각을 양 측면 전면 세 곳에 마련하였음이 이채롭다.
통도사 대웅전에서는‘순치(順治) 2년’이라는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었는데, 순치 2년은 1645년(인조 23)에 해당하므로 건립연대가 확실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축으로서의 의의를 갖는다.
한편 금강계단은 646년(선덕여왕 15)에 축조된 이래 특히 고려시대에 이에 얽힌 수많은 기록들이 전해 오고 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계단의 석종을 들어보려는 일이 잦았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석함 속에는 긴 구렁이 또는 큰 두꺼비가 있었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1235년(고종 22) 상장군(上將軍)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郎) 유석(庾碩)에 의해 계단의 석종이 들려졌다. 『삼국유사』 권3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에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큰 일에 상장군 김공 이생과 시랑 유석이 고종의 명을 받아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 왕이 하사한 기(旗))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뚜껑을 들어 예하고자 하니, 승(僧)이 그 전의 일을 들면서 어렵다고 하였다. 김이생과 유석이 군사를 시켜 굳이 돌뚜껑을 들게 하였다. … 서로 돌려보며 예경하였는데 통이 조금 상해서 금간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이 수정함(水晶函) 하나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침 기부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니 그때는 강화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째인 을미년(1235년)이었다.”
이 기록은 문헌상으로는 계단에 손을 댄 최초의 기록이다. 1379년(우왕 5) 고려 말에 국세가 약해진 틈을 타서 왜구들이 빈번히 침입하여 이 계단은 일대 수난을 겪었다. 이색(李穡)의 『양주통도사석가여래사리기(梁州通度寺釋迦如來舍利記)』에 따르면 통도사의 주지 월송(月松)이 왜구들의 침입을 피해 1379년 8월 24일 석가여래의 사리와 가사 등을 가지고 서울의 평리(評理) 이득분(李得分)을 만난 일이 있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영남 지방이 왜구의 수중에 들자 의승장 유정(惟政)은 통도사의 사리를 대소 2함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던 휴정(休靜)에게 보냈다. 이에 휴정은 “영남이 침해를 당하고 있으니 이곳 역시 안전한 장소는 못된다. 영축산은 뛰어난 장소이고 문수보살이 명한 곳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신보(信寶)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을 수리하여 안치하라”고 하였다.
이에 1함은 돌려보내고 나머지 1함은 태백산 갈반지(葛盤地)에 안치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 계단을 다시 복구하였다. 1652년(효종 3)에 정인(淨人)이, 1705년에는 성능(性能)이 중수하였다. 그 뒤에도 영조·순조·헌종·고종대에 걸쳐 여러 차례 중수된 후 1919년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통도사 금강계단은 상로전(上爐殿) 영역에 있고, 전면에는 대웅전이 배치되어 있다. 통도사 금강계단은 초층 너비 약 9.9m, 총 높이 약 3m이며, 이중의 넓은 방단(方壇) 위에 석종(石鐘) 모양의 부도를 안치하였다. 석단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입상을 배치하였고, 기단 상·하면 돌에는 비천상과 불·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석단 외곽에는 석조 난간을 돌렸고, 계단 정면에는 석문(石門)을 두었으나 모두 후기의 작품이다.
계단의 초층 면석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나타냈으나 모두 도상적으로 경직성을 띠고 있다. 계단의 상층 중심부에 위치한 석종형 부도는 복련과 앙련의 상·하 연화대 위에 위치하며, 그 조각수법이 다른 조각들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 상층 기단 면석의 불·보살 및 비천상의 양식은 하층보다는 한결 유연하며, 정면인 남쪽에는 구름 속에 보합(寶盒)의 향로를 조각하였다.
[현황]
1997년 1월 1일 국보 제29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보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통도사 대웅전은 금강계단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에 금강계단을 향하고 있고 본전에는 불단만 설치되어 있고 불상은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의 규모는 양측면이 5칸, 정면이 3칸의 평면이며, 지붕의 형태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것도 이 건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다. 건립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축인 대웅전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담고 있는 금강계단은 각각 건축 구조와 건축사 연구, 계단(戒壇)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에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금강계단은 통도사 경내에 현존하는 석조물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 그 계단이 지닌 의미에서도 중요하나, 같은 성격을 띤 금산사나 용연사의 것보다도 규모도 크고 조형미도 뛰어나므로 한국 계단 건축을 대표하는 유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