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17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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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甑山 |
영어음역 | Jeungsan |
영어의미역 | Jeungsan Mountain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증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병운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증산리에 있는 산.
[개설]
증산은 양산시 물금읍에 위치한 시루처럼 생긴 산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63호로 지정되었으나 1997년 일제강점기 등록문화재 재심의 시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 지정에서 탈락되었다. 일설에 증산 서쪽 낙동가의 사지리(沙旨里)라는 마을 이름에 착안한 사지성(沙旨城) 혹은 사도(沙道)와 상통하는 것으로 보아 이를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사도성(沙道城)으로 보는 학자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사도성은 영덕 부근의 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과 김해 각성산의 성 터로 보아 증산은 물금에 있는 증산으로 보아야 한다.
현재 증산마을 뒤편과 남부마을 뒷산 능선으로 이어진 곳에 성 터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을 뿐, 정유재란 당시 정상 부위와 남쪽 등성에 왜인들이 왜성을 축조하면서 거의 훼손되었고, 또 경부선 철도 부설 시 마지막 남은 서쪽성 일부가 모두 허물어졌다. 그러나 정상부 서쪽성 기단층에는 신라성의 흔적이 보이며 그 기초 위로 왜성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
이달정종(伊達政宗)이 쌓았다고 해서 이달성지(伊達城地)라고도 한다. 이 일본식 석성은 정유재란 시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등이 쌓고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부자가 수비하였다고 한다. 성에 이용된 돌은 황산역(黃山驛)의 석축을 허물어 나온 돌이라고 한다.
수비를 맡은 구로다 나가마사는 다음해 3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의 명령에 의하여 본성에서 철수, 감동포성(甘同浦城)으로 옮겨 갔다. 현재는 석축이 대부분 무너진 채 성곽 일부가 남아 있으나, 이 일대가 공동묘지로 시용되면서 성내·외는 민묘(民墓)로 가득 차 있다. 성의 총 둘레는 약 1.5㎞이고, 높이는 12.8m이며, 남쪽 성지는 높이가 9m이고, 둘레가 300m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15년(지마왕(祗摩王) 4) 2월에 가야가 남쪽 변방(황산) 지역을 침범하였다. 7월에 왕은 친히 가야를 정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황산강을 건넜는데 가야 사람들은 숲속에 복병(伏兵)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왕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나가다가 곧 앞에 숨어 있던 복병에게 몇 겹으로 포위당했다. 그러나 왕은 군사를 격려하며 분격하여 포위를 뚫고 군사를 돌려 물러났다.
116년(지마왕 5) 8월에 왕은 장병을 파견하여 가야로 쳐들어가게 하고 이어 정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그 뒤를 따라 쳐들어가니 가야에서는 성을 둘러 군사를 정비하고 굳게 지켰다. 때마침 오랫동안 비가 와 왕은 군사를 돌렸다.
121년(지마왕 10) 2월에 대증산성(大甑山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나타난 대증산성을 동평현(東平縣)의 옛 이름에 착안하여 현재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가야동 일대로 보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115년에 친히 황산하를 건너 가야를 정벌하였고 이때 복병을 만나 실패하여 다시 116년에 정병 1만을 거느리고 재차 정벌에 나섰으나 장마로 실패한 사실로 보아 물금의 증산임에 틀림이 없다. 지정학적으로 황산은 경주(신라)와 김해(금관가야)의 직로로 교통 및 군사 요충지로 매우 중요시되었으며 가야와 가장 많은 전쟁이 일어났던 지역이었던 것이다.
『양산군지』(1989)에는 ‘증산’은 “군 서쪽 12리에 있으니 곧 황산의 안산(案山)[풍수지리에서 집 터나 묏자리의 맞은 편에 있는 산]이다. 뻗어온 주령(主嶺)이 없어 형상이 시루와 같다 하여 그리 이름 하였다. 물금 쪽에서 보면 학이 나는 형상을 하고 또한 자라가 기어가다 멈춘 모양으로도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칭유래]
증산은 원래 ‘시리산’, ‘시루산’으로 불렀다. ‘시리산’이란 독메로 꼭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은 형상이라 이름한 것이다. 현재 증산(曾山)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이는 증산(甑山)의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