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0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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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山驛 |
영어음역 | Hwangsann-yeok |
이칭/별칭 | 황산찰방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근열 |
[정의]
조선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개설]
조선시대 찰방역은 찰방(종6품) 1명이 관장했고, 역리들이 역의 관리와 공무를 담당했다. 특히 중앙 직속 기관이었던 찰방은 역정(驛政)의 최고 책임자였으며, 세력 또한 막강해 양산 지역에 어사가 순찰을 돌 때 보필했을 뿐 아니라 군수(종4품)의 치정을 견제하는 역할까지 했다. 황산역은 조선 세조 때 만든 40개 찰방역 가운데 하나이며, 11개의 속역을 두었다.
이 속역은 잉포(仍浦)·노곡(奴谷)·윤산(輪山)·위천(渭川)·덕천(德泉)·굴화(堀火)·간곡(肝谷)·아월(阿月)·소산(蘇山)·휴산(休山)·신명(新明) 등이었다. 원래는 승(丞)을 두었다가 1510년(중종 5)에 찰방(察訪)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다. 『영남역지(嶺南驛誌)』에 따르면 11개 속역 외에 동래·언양·밀양 등지의 16개 역을 관할하였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후대에 황산역의 찰방역 역할이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역원조에 황산역의 내용이 나오며, 특히 북정역과 호포원이 없어진 것으로 밝히고 있다. 『대동지지』의 역참(驛站) 조에 황산역에 관한 확인과 윤산역, 위천역, 원포역 등이 황산역에 속해 있음을 밝히고 있다. 1786년(정조10)의 『양산군읍지』의 황산역조에서는 황산역의 위치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내용]
황산역에는 역리 7,638명과 남·여 노비 1,176명 등 총 8,814명이 소속되었으며 큰 말 7마리, 중간 말 29마리, 짐 싣는 말인 복마(卜馬) 10마리 등 모두 46마리의 말이 배치됐다. 황산역은 동헌(東軒), 내동헌(內東軒), 장적고(帳籍庫), 창고(倉庫), 작청(作廳), 관청(官廳), 장적청(帳籍廳), 형리청(刑吏廳), 관노청(官奴廳), 사령청(使令廳), 일아정(日哦亭), 환취정(環聚亭) 등 10동의 관청 건물과 2동의 누각으로 구성되어 꽤 넓은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변천]
황산역은 동래를 거쳐 올라온 관리들이 밀양이나 김해로 들어가기 위한 길목에 있었다. 『물금읍지(勿禁邑誌)』에 따르면 황산역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서부 포교당 아래 690번지 일원으로 보고 있다.
황산역은 1857년(철종 8) 낙동강의 범람으로 물에 잠기자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439번지 일대로 옮겨져 1895년(고종 32) 역원제가 폐지될 때까지 40여 년간 존속했다. 그러나 지금의 상삼리 일대는 거의 밭으로 변해 황산역 터는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