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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리 미륵암」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31517
한자 小亭里彌勒庵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미평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96년 2월 - 정홍수 「소정리 미륵암」 조사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6년 - 「소정리 미륵암」, 『여수 구비문학 발간 및 무형문화재 발굴에 따른 자료조사 학술용역 결과보고서』에 수록
관련 지명 소정리 미륵암 - 전라남도 여수시 미평동지도보기
채록지 「소정리 미륵암」 채록지 - 전라남도 여수시 미평동지도보기
성격 설화|교훈담
주요 등장 인물 백발노인|정영민|황유찬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미평동 소정마을에 있는 미륵암 비석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미평동 소정마을은 원래 쇠징이, 소징이로 부르던 곳이다. 산자락이 가늘게 끝을 이룬 곳, 작은 길목에 있어 소정이라 이름하였다. 「소정리 미륵암」은 소정마을에 영광정씨 정영민이 입향하면서 세운 미륵암에 대한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6년 간행한 『여수 구비문학 발간 및 무형문화재 발굴에 따른 자료조사 학술용역 결과보고서』에 「소정리 미륵암」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1996년 2월 정홍수가 여수시 미평동으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정병오[남, 70세]에게서 채록하였다.

[내용]

여수시 미평동 소정마을 옛 국도 변에는 높이 3m, 둘레 4m가량의 자연석 비석이 서 있다. 그 비석에는 큰 글씨로 '미륵암'이라 새겨져 있으며 아래쪽 줄에는 “여수시 미평동 대로변에 쓰러져 있는 미륵암을 경술년에 영광인 정영민이 다시 세웠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을 미륵암이라고 부르게 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한제라는 마을에 정영민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문밖에서 “영민아, 영민아.” 하고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문밖으로 나갔더니 흰 장삼에 구절죽장(九節竹杖)을 짚은 백발노인이 서 있는데, 눈에서 나오는 광채에 압도되어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었다. 정영민이 엎드려 “예, 제가 영민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백발노인은 “나는 호암산 미륵불인데 너에게 당부할 일이 있어 찾아왔으니 내 뒤를 따르라.” 하고 말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하여 정영민이 빠른 걸음으로 뒤를 쫓아갔는데 노인과의 거리를 좁힐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당도한 곳은 현재 미륵암이 서 있는 지점이었다. 이곳은 90년 전만 해도 잡목 사이로 풀들이 우거진 호암산 기슭이었다. 걸음을 멈춘 백발노인은 구절죽장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내가 이곳에 묻혀 있노라. 한 달 후가 되면 왜놈들이 이곳에 신작로 공사를 하면서 나를 해칠 우려가 있으니 미륵암이라 이름을 새겨 이 자리에 세워 주고 옆자리에 집을 짓고 사노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꿈을 깬 정영민은 신기한 마음으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꿈속에서 인도되었던 곳을 찾아가 보았더니 비석 같은 암석이 비스듬히 잡초 사이에 쓰러져 있는데 반신이 흙 속에 묻혀 있었다. 정영민은 두 손을 모아 큰절을 올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 “영험하신 미륵님께서 현몽하신 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하고 말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서둘러 석수를 불러 데리고 가서는 미륵암이라 새긴 다음 백발노인이 가리킨 곳에 세우고 제물을 차려 미륵제를 정성 들여 지낸 후에 그 옆에 초가삼간을 짓고 홀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주변을 서성거리던 신사가 담뱃불을 좀 빌리자고 하였다. 정영민은 신사에게 불을 붙여 주면서 친절하게 자리를 권하였다. 잠시 후 신사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정영민은 “이곳이 좋아서 하는 일 없이 살아갑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신사는 정영민을 바라보면서 “그래요? 그러시면 술장사를 해 보겠소?” 하였다. 정영민은 의아스러운 마음으로 “선생님, 술장사라니요?”라고 묻자 신사는 웃으면서 “주막집 술장사가 아니라 탁주를 만드는 양조장을 해 보겠느냐는 말이요. 해 볼 생각이 있으면 내일 군청에 와서 배 주사를 찾으시오.”라고 말하고는 가 버렸다.

신사가 돌아간 후 정영민은 백발노인이 한 말을 생각해 냈다. 그리하여 뒷날 군청 배 주사를 찾아갔는데, 배 주사는 반가이 맞아 준 후 ‘다께다’라는 일본인을 소개해 주었다. 여천군청의 세무관으로 인허가 사무를 관장하고 있던 실력자 다께다는 정영민에게 “양조장 허가를 신청한 사람이 많은데 배 주사가 현지를 다녀온 후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이 양조장의 적지라고 해서 신청만 하면 허가할 생각이니 빨리 신청을 하시오.”라고 말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정영민이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골몰하고 누워 있는데 재산가로 알려진 서재수가 찾아왔다. 서재수는 “그동안 잘 있었는가? 자네가 이곳에 집을 짓고 홀로 생활하고 있다기에 찾아왔네. 고생이 심하지?” 하고 정영민의 손을 잡고 위로하였다. 그러나 정영민은 멍한 표정으로 대답을 못 하였다. 이에 서재수가 궁금한 듯 다시 물었다. “친구 사이에 못 할 말이 있는가? 고민이 있으면 말해 보게.” 하였다. 그제야 정영민은 양조장과 관련한 사연을 설명하였다. 서재수는 “걱정 말게. 친구 좋다는 게 무엇인가? 사업 자금부터 허가 신청에 이르기까지 내가 맡을 것이니 자네는 힘을 내어 장사 준비나 하게.”라고 하였다.

그렇게 정영민은 친구의 도움으로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한 달이 못 되어 여수·순천 간 신작로 개설 공사가 시작되어 술을 만들기가 바쁘게 팔려 나갔다. 더욱이 여수·광주 간 철도 공사, 미평 제1수원지 조성 공사 등이 계속되면서 사업은 계속 번성하여, 개업한 지 10년 만에 여수면 내에서 굴지의 부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미륵암 부근에는 현재의 소정마을이 형성되고 시외 여덟 개 마을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1951년 소정마을과 철길을 사이에 둔 평지마을에 호열자라는 무서운 전염병이 발병하여 사람들의 통행을 제한하는 공포 속에서 소정마을 사람들은 가슴 졸이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때 이 마을 동수인 황유찬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나는 이 마을 미륵불인데 병마의 침입을 막고 있으니 안심하여라.”고 하면서 비를 들어 동구 밖 행길[한길]을 쓰는 꿈을 꾸었다. 다음 날 황유찬은 마을 사람들에게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날을 받아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는 마을 제사를 지냈다. 미륵불의 영험 때문이었는지 마을은 전염병으로부터 무사하였다. 그로부터 미륵암은 마을의 수호신인 미륵불의 신체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미륵암을 세워 부자가 된 영광정씨 후손들은 소정마을 터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현황]

2022년 현재 여수시 미평동 소정마을에는 미륵암 비석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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