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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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處仁城戰鬪 |
영어음역 | Cheoinseong Jeontu |
영어의미역 | Cheoinseong Battle |
이칭/별칭 | 처인승첩,처인성승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성환 |
[정의]
1232년 12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처인성에서 처인부곡민과 몽고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역사적 배경]
1231년 몽고의 1차 침입 이후 고려 정부는 1232년 6~7월에 강화로 천도하였다. 몽고는 기존의 화약을 파기한 책임을 물어 1232년 10월 2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몽고의 2차 침입은 고려 정부의 천도가 몽고와의 대결을 전제로 했다는 점이 명백해진 상태에서의 군사적인 해결책이었다.
이에 몽고군은 고려의 전 영토를 유린하기 위해 남진했으나 이세화(李世華)가 이끄는 광주민의 저항으로 광주성 공략에 실패하였다. 이에 광주성을 포기하고 다시 남진하던 몽고군은 그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 비교적 작은 성인 처인성을 상대로 전면적인 공성전을 펼치게 되었다.
처인부곡민과 주변의 주민들은 낮은 구릉지에 흙으로 쌓은 둘레 400m 정도의 작은 성에 모여 몽고군의 침탈을 피해 있었다. 그들은 당초 살리타가 이끄는 몽고군과 전투를 하려는 목적은 없었고, 그들의 침탈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있었으나 몽고군이 전면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자 이에 맞섰다.
[경과]
처인성 전투에 대해서 『원사(元史)』고려전에는 “살리타가 고려를 정토하던 중 처인성에서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고려사』에는 “1232년(고종 19) 12월 살리타가 처인성을 공격하자, 중 한 사람이 난을 피하여 성안에 있다가 그를 쏘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고려사』김윤후전(金允侯傳)에서 승려의 이름이 백현원(白峴院)의 김윤후라고 밝히고 있을 뿐 전투의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전투 직후 동진국(東眞國)에 보낸 고려의 편지에서 승첩의 날이 12월 16일이었고, 사로잡은 몽고군 역시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결과]
전투에서 주장 살리타의 죽음으로 몽고군은 철가(鐵哥)의 지휘 아래 곧 철군하였다. 이는 몽고 2차 침입이 실패로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철군 역시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고, 지휘 체계의 혼란과 이에 따른 개별 부대의 약탈 등도 나타났다. 처인성에서의 승리로 처인부곡은 군현으로의 승격되어 처인현이 되었고, 전투에서 처인부곡민을 이끌었던 김윤후는 섭랑장을 제수받았다.
[의의와 평가]
처인성 전투에서의 승리는 갑작스런 천도와 여러 지역에서의 민란 등으로 극히 취약해진 최씨 무인 정권에게 강력한 반몽책을 견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아울러 순수한 지역민들의 자위적인 항전이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 때의 의병 운동의 원류로 인식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