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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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達濟 |
영어음역 | O Dalj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양촌마을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영의 |
[정의]
조선 중기 용인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오경민(吳景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공감역을 지낸 오희문(吳希文)이고, 아버지는 오윤해(吳允諧)이며, 어머니는 최형록(崔亨綠)의 딸이다.
[활동사항]
경기도 송탄의 이충부락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34년(인조 12)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典籍)·병조좌랑(兵曹佐郞)·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등을 거쳐 1635년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1636년 홍문관수찬을 거쳐 부교리가 되었다. 이때 후금(後金)의 위협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5차례에 걸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주화파(主和派)의 최명길(崔鳴吉)을 탄핵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淸)과의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파의 주요 인물로 활약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한 뒤 적진(敵陣)에 송치되었으나 적장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에 굽히지 않아 다시 심양(瀋陽)으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도 갖은 협박과 유혹에 굴하지 않아 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에 그들의 충절을 찬양하여 후세에 삼학사(三學士)라 불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있다. 묵매도 2점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양촌마을 산 45-14번지에 있다.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대낭장비(帶囊藏碑)는 1824년(순조 24) 손자인 오경원(吳慶元)이 세운 것이다. 용인시 향토유적 3호이다.
[상훈과 추모]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광주의 현절사(顯節祠)·평택의 포충사(褒忠祠)·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