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8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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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景奭 |
영어음역 | Lee Gyeongseok |
이칭/별칭 | 상보(尙輔),백헌(白軒),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원명 |
[정의]
조선 중기 충렬서원 원장을 역임한 문신.
[개설]
이경석(李景奭)[1595~1671]은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산림의 학자들을 대거 천거하여 요직에 오르도록 도와주었으나 훗날 그가 천거한 송시열과 정적이 되어 노소분당(老少分黨)이 이루어지면서 소론의 비조가 되었으며, 조선 중기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주관하였던 명상(名相)으로 꼽힌다.
병자호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지은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에 대해 당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에서는 청나라에 아첨한 행동이라고 비난하는 등, 특히 사후에 심한 논란거리가 되었으나, 이는 국난 극복을 둘러싸고 나타난 현실 인식의 차이에서 빚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 종실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6세손으로 함풍수(咸豊守) 이계수(李繼壽)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수광(李秀光)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侃)이며, 어머니는 대호군(大護軍) 고한량(高漢良)의 딸이다.
[활동사항]
1613년(광해군 5) 진사가 되고 1617년(광해군 9) 증광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뒤의 알성문과(謁聖文科)에서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검열·봉교로 승진하였고 춘추관사관(春秋館史官)도 겸임하였다.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몽진할 때 승문원주서로 왕을 호종하였다. 이어서 봉교·전적·예조좌랑·정언·교리 등을 거치고, 1626년(인조 4) 호당(湖堂: 독서당이라고도 함)에 들어갔다. 이조의 좌랑과 정랑에 올라 인사행정의 실무를 맡게 되었으나,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체찰사 장만(張晩)의 종사관이 되어 강원도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데 힘썼다. 정묘호란 후 다시 이조정랑 등을 거쳐 승지에 올라 측근에서 인조를 보필하였다.
1629년(인조 7) 자청하여 양주목사로 나아가 목민관으로서 실적을 올렸다. 승지를 거쳐 1632년(인조 10)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1636년(인조 14) 일어난 병자호란 때 대사헌·부제학으로서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이듬해 청나라의 승전을 기념하는 삼전도비의 비문을 지었다. 비문을 완성한 후, 그는 형에게 문자 배운 것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이듬해 홍문관·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이 되었고, 얼마 뒤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에 발탁되어 조정의 인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1641년(인조 19)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사(貳師: 세자의 보필기관인 세자시강원의 종1품 벼슬)가 되어 심양으로 가 현지에서 어려운 대청 외교를 풀어 나갔다.
1642년(인조 20) 명나라 선박이 선천에 들어온 일이 청나라에 알려지자 그 사건의 전말을 사문(査問)하라는 청나라의 명을 받고 서북 지역으로 돌아왔는데, 조선의 관련 사실을 두둔하느라 청 황제의 노여움을 사 영원히 등용하지 않는다[永不調用]는 조건으로 귀국, 3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4년(인조 22) 복직,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 뒤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650년(효종 1) 효종의 북벌 계획이 청나라에 알려지자 또 한 차례의 사문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의 사문사는 남별궁에서 영의정 이경석과 정승·판서 및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 놓고 북벌 계획의 전말을 사문, 치죄하고자 하였다.
그 자리에서 이경석은 모든 일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하였지만,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하게 되었다. 국왕이 구명을 간청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청나라 황제의 명에 의하여 다시 영불조용의 명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나 1년 남짓 경기도 성남시의 판교와 석문에서 은거하였다.
1653년(효종 4)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659(효종 10)년 영돈령부사가 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68년(현종 9) 관료로서 최고의 영예인 궤장을 하사받았다. 말년에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충렬서원(忠烈書院)의 제4대 원장을 역임하였다. 이경석이 죽자 임금은 3년간 녹봉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학문과 사상]
평생 『소학(小學)』과 『논어(論語)』를 거울삼아 수양하였고, 노년에는 『근사록(近思錄)』과 주자제서(朱子諸書)를 탐독하였다.
[저술 및 작품]
조경(趙絅)·조익(趙翼) 등과 함께 『장릉지장(長陵誌狀)』을 편찬하였으며, 『백헌집(白軒集)』 등 유집 50여 권이 간행되었다. 이경석은 특히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는데, 그의 문장은 “기력이 웅혼하여 광화현란(光華絢爛)하며, 시도 풍부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정묘호란 당시 체찰사 장만의 종사관으로 활동할 때 쓴 「격강원도사부부로서(檄江原道士夫父老書)」는 특히 명문으로 칭송되었다.
글씨로는 「좌상이정구비문(左相李廷龜碑文)」, 「이판이명한비(吏判李明漢碑)」, 「지돈녕정광성비문(知敦寧鄭廣成碑文)」 등이 있다. 그 밖에도 그의 글씨는 『백헌필적(白軒筆蹟)』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필첩(筆帖)은 1653년(효종4) 병조판서를 지내다 갑자기 타계한 박서(朴遾)를 위해 직접 쓴 제문을 후손들이 ‘백헌필적(白軒筆蹟)’이라는 표제를 붙여 첩으로 만든 것이다.
[묘소]
청계산의 서남쪽 구릉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1번지인 속칭 대감능골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전주이씨 백헌공파에서 관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구례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이 행장을 찬술하고 지중추부사 박세당(朴世堂)이 신도비명을 찬술하였다. 1706년(효종 33)에 문충공 이경석 효자정문(孝子旌門)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