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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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夢周 |
영어음역 | Jeong Mongju |
이칭/별칭 | 몽란(夢蘭),몽룡(夢龍),달가(達可),포은(圃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영의 |
[정의]
고려 말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정운관(鄭云瓘)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하여 1362년 예문관의 검열·수찬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하여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모해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청하여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이듬해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거쳐,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 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와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그는 홀로 부모상을 당하여 3년간 여묘(廬墓)살이를 하고 슬픔을 다하였기 때문에 1366년 정려가 내려졌다.
이듬해 예조정랑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朱子集註)』에 대하여 정몽주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르게 뛰어나 모두들 의아해하더니,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전하여지면서 이와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고, 대사성 이색(李穡)이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파선을 당하여 일행 12인이 익사하고, 정몽주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 일본의 구주(九州)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 백 명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전공사(典工司)·예의사(禮儀司)·전법사(典法司)·판도사(判圖司)의 판서를 역임하고, 1380년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와, 이듬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녹훈되어,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1382년 진공사(進貢使)·청시사(請諡使)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봉사하였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하여 요동(遼東)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을 증액하며,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하는 등 국교관계가 몹시 악화되었기 때문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렸으나, 정몽주는 사명을 다하여 긴장상태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5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하여 결국 그 뜻을 관철하였다. 귀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군되었으며, 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어 요동에서 되돌아와,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이듬해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초(彛初)의 옥사가 일어나, 당시 조정에서 몰려난 구파정객들에 대한 대간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하여 탄핵을 받고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이어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하였으며, 이듬해 『대명률(大明律)』·『지정조격(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 산정하여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 모의를 알아채고 제거하려 하던 중,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이성계의 핵심인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을 유배 보냈는데, 사태의 위급함을 알아챈 이방원(李芳遠)이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학문과 사상]
천품이 지극히 높고, 뛰어나게 호매(豪邁)하여 충효를 겸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조예가 깊었으며, 그의 시문은 호방, 준결하였다.
그는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례』에 의하여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하여 예속이 다시 일어났다. 또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어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하였으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는 한편, 기강을 정비하여 국체를 확립하고,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도태하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며,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포은집』이 있으며, 「단심가(丹心歌)」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에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다. 영정 2점과 친필이 남아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산3번지[능곡로 45]에 있으며, 묘표와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조선 1699년(숙종 25)에 세웠는데, 현종 때의 문신 김수증이 썼고, 글은 송시열이 지었다. 전액은 김수항이 썼다. 경기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401년(태종 즉위)에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문충공이라는 시호와 익성부원군의 작훈을 내렸다. 1405년(태종 5) 권근(權近)의 요청에 의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을 추증하였다.
1517년(중종 12)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에 의하여 문묘에 배향하고, 또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아 그가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하였다. 또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永慕齋),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등 몇 곳의 서원에는 그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