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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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涓 |
영어음역 | Jo Yeon |
이칭/별칭 | 여정,조경,양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라동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광준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조연(趙捐)[1374~1429]은 벼슬에 나간 뒤 파천된 일이 없었고 4대조에 걸쳐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재화를 탐하지 않고 국정에 힘썼다. 문신이면서도 야인 정벌에 무공을 떨치기도 하였다.
[가계]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정(汝靜), 초명은 조경(趙卿). 아버지는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이고, 어머니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부친인 환조(桓祖)의 큰딸 정화공주(貞和公主)이다.
[활동사항]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한 후 1392년(공양왕 4) 공조총랑(工曹摠郞)을 지냈다. 조선이 건국되자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으로 별운검(別雲劍)이 되어 좌우에서 왕을 호위하였다.1396년(태조 5) 과의상장군(果毅上將軍)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중추원(中樞院) 승지(承旨)를 역임하다 삼군부(三軍府) 동지사(同知事)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李芳遠)을 도와준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고, 한평군(漢平君)에 봉해졌다. 1402년(태종 2) 우군총제(右軍摠制)를 거쳐 1404년(태종 4) 도총제(都摠制)를 역임한 뒤 무과회시(武科會試)의 감교관(監校官)이 되어 33인의 무신을 뽑았다.
1407년(태종 7)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된 후 이듬해 왜선(倭船) 40여 척이 나타났다는 풍해도(豊海道)[현 황해도] 관찰사(觀察使)의 보고에 따라 안산·부평의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파견되었으나 조선의 표류선임이 뒤늦게 확인되어 돌아왔다. 1408년(태종 8) 상호군겸좌군도총제(上護軍兼左軍都摠制)·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409년(태종 9) 병서강토총제(兵書講討摠制)가 되었고, 이듬해 길주도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安撫察理使)로 나가 변방을 침범하는 야인의 적장 파아손(巴兒孫) 등을 유인해 죽인 뒤에 두만강을 건너 적의 본거지까지 쳐부수고 남녀 포로 수십 명을 잡아 와 명성을 날렸다.
1412년(태종 12) 중군도총제겸판사복시사(中軍都摠制兼判司僕寺事) 등을 역임하고, 1413년(태종 13) 공조판서(工曹判書)·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역임하였다. 1416년(태종 16) 판좌군부사(判左軍府事)가 되었고 이듬해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1419년(세종 원년) 세종이 즉위하자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다. 1420년(세종 2)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고, 1426년(세종 8)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에 있으며, 사당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라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양경(良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