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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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任景宰銅像 |
영어음역 | Im Gyeongjae Dongsang |
영어의미역 | Statue of Im Gyeongjae |
이칭/별칭 | 의병장 옥여 임경재비 및 상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작품/미술과 공예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인영 |
성격 |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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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동상|비 |
건립시기/일시 | 1993년 6월 10일 |
재질 | 브론즈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
소유자 | 풍천임씨 종가 |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에 있는 구한말 의병장 임경재를 기리는 동상.
[개설]
농상공부 주서였던 임경재는 스러져가는 정국을 개탄하며 1907(순종 1) 7월에 이천군 신면 이근풍(李根豊)의 집에서 주창용, 신규희, 조상현 등과 의병으로 나설 것을 결의하고 의병대를 편제하였다. 좌익장이 된 임경재는 용인, 이천, 광주, 죽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혁혁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1907년 11월에 수원수비대에 체포되었다. 향년 36세의 나이에 임경재는 처형되었다.
[건립경위]
임경재 동상은 당시 용인문화원장이던 박용익이 임경재의 후손과 풍천임씨 문중의 후원을 받아 1993년 6월 18일에 건립하였다.
[위치]
임경재 동상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마을 입구를 지나는 국지도 17호선 변에 있다.
[형태]
높이 200㎝ 정도의 자연석 좌대 위에 170㎝ 정도 크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금석문]
임경재 동상의 앞면에는 “의병장옥여임경재(義兵將玉汝任景宰)”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추모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말미에 “1993년 계유 6월 10일(음 4월 29일).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문학박사 박영석 삼가 짓고, 국립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황재국 삼가 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임옥여는 을사늑약 이후 농상공부 주사의 직을 버리고 이천에서 창의 기병한 후 좌익장을 맡아 이천 주둔 일본 기병대를 급습 타격을 가하고 우편취급소, 순사분파소 등을 급습 파괴하는 등 의병활동은 이때로부터 시작되었다.
원주의 의병대와 합류, 일본군과 접전하고, 광주·양근 등지에서 적을 연파하였고, 포군 1,800여 명을 인솔, 안성의 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죽산으로 이동 일본의 중촌소대(中村小隊)와 교전하여 타격을 가하였다.
그 후 의병장 정주원 부대와 연대하여 양지, 죽산, 음죽, 용인 등지에서, 김봉기 부대와는 광주, 이천, 여주 등지에서 합동작전을 전개, 혁혁한 전과를 올리던 중, 용인 헌병대에 체포되고 수원수비대에 압송된 후 총살되었고 그 시신마저 거두지 못했다.
(중략) 이에 명하노니 당신께서 뿌리신 숭고한 피로 광복이 왔고, 되찾은 금수강산은 번영을 구가하니 명부의 당신이어 기뻐하소서, 조국을 위해 의분에 울고, 민족을 위해 형자하던 당신의 위대한 삶을 영원토록 추모코자 이에 새기노라.”
[의의와 평가]
용인에서 항일 의병활동을 펼친 사람들은 많았으나 추모비와 동상을 건립한 것은 임경재가 최초이다. 따라서 용인시에서 실시한 독립항쟁의 역사적 사실을 기리는 사업의 효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