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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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碑 |
영어음역 | Bi |
영어의미역 | Memorial Stone / Tombstone / Monument |
이칭/별칭 | 탑비,묘비,신도비,묘표,묘갈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은선 |
[정의]
경기도 용인시에 분포하고 있는, 사적(事蹟)을 전하기 위해 나무·돌·쇠붙이 등에 글을 새겨 세워놓은 것.
[개설]
비는 내용에 따라 불교유적과 관련된 탑비(塔碑)와 유교유적과 관련된 묘비(墓碑)·신도비(神道碑)·사적비(事蹟碑)·송덕비(頌德碑)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탑비는 승려의 생애를 적은 비이고, 묘비와 신도비는 공업(功業)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의 평생 사적을 기록하여 묘역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사적비는 어떤 사건이나 공업(功業)에 관련된 사실이나 자취를 기록한 비로, 오늘날 전래하는 사적비는 특히 사찰과 관련되는 것이 많다. 송덕비는 일반적으로 그 지역의 벼슬아치가 은혜와 교화를 끼쳤을 때 그 공덕을 칭송하는 비이다.
용인은 예로부터 명현의 유적이 많은 유서 깊은 지역으로 현존하는 유물 중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분야가 비석이다. 불교탑비의 가장 대표적인 고려시대의 서봉사 현오국사탑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선시대의 묘비(墓碑)·신도비(神道碑)가 집중되어 있는 점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용인 지역에서 조사 확인된 역사 시대 비석 수량은 약 200여 점이 넘는다. 이들 비는 질적으로도 우수할 뿐 아니라, 조선시대 전국 유림의 역사를 대표하는 주요 문화재이다. 용인에서는 아직까지 고려시대 이전의 비석은 발견된 사례가 없다. 따라서 현재까지 이 지역의 가장 이른 시기의 비석은 고려시대부터 출발한다.
[고려시대의 비]
고려시대 용인의 대표적인 비석은 서봉사현오국사탑비(瑞峰寺玄悟國師塔碑)[보물 제9호]이다. 서봉사지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21번지에 위치하며, 수원시와 경계인 광교산의 동남쪽에 위치한다.
현재 서봉사현오국사탑비는 서봉사지 내에 보호각 안에 있는데, 총 높이는 220㎝, 폭은 100㎝, 두께는 12㎝이다. 비의 설립 연대는 대정(大定) 25년, 즉 1185년(명종 15)이며, 비문은 이지명(李知命)[1127~1191]이 지었고[撰], 유공권(柳公權)[1132~1196]이 썼다[書].
비문은 거의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며, 제액(題額)은 ‘증시현오국사비명(贈諡玄悟國師碑銘)’이다. 제액은 자경(字徑) 8㎝의 전서(篆書)이며, 본문은 자경 3.3㎝의 해서(楷書)이다.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현오국사는 고려 중기의 승려로 이름은 종린(宗璘), 자는 중지(重之), 속성(俗姓)은 왕씨(王氏)이다. 인종이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여풍(餘風)을 이을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였는데, 현오가 그 뒤를 이어 나이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수계(受戒)하고 1147년(의종 즉위년) 이후 수좌(首座)가 되었다.
1178년(명종 8) 나이 53세(法臘 39세)에 입적함에 왕이 심히 슬퍼하여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郎) 최광유(崔光裕) 등을 보내어 국사에 봉하고, 시호를 현오라 하였으며, 동림산(東林山) 기슭에서 다비(茶毘)하게 하였다.
현오국사탑비의 형태는 비신은 양 모서리의 각을 깎아낸 말각형이고, 대석은 방부형이다. 비의 재질은 비신은 점판암이고, 대석은 화강암이며, 현재 비신 좌측에 약간의 손상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비석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이수귀부형의 탑비와는 달리 고려 말에 새롭게 유행하는 형태로, 보경사원진국사비(寶境寺圓眞國師碑)[보물 제252호], 억정사대지국사비(億政寺大智國師碑)[보물 제16호], 보광사대보광선사비(普光寺大普光禪師碑)[보물 제107호] 등에서도 보이고 있다.
이런 말각방부 형태의 비석은 탑비뿐만 아니라 묘비의 형태에도 영향을 미쳐 조선 전기에 유행하게 된다. 이 비는 문헌 자료가 별로 남지 않은 용인 서봉사가 12세기 후반 불교계에서 중시되는 사찰로 추정할 수 있는 중요 단서가 되며, 단순하면서도 정갈한 형태의 용인의 대표적인 국사비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비]
용인의 조선시대 비석은 묘비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조선시대의 용인은 유림(儒林)의 표상이었던 포은 정몽주를 비롯하여 중종조의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유적지가 산재한다. 또한 조광보(趙光輔)·이자(李耔)·김세필(金世弼) 등 충신(忠臣)의 고장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기호학파의 맹주로 추대되는 이재(李縡) 또한 용인의 유명한 학자이다. 따라서 용인에서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비석의 종류는 조선시대 유림의 신도비·묘갈·묘표 등의 묘비류이다.
이러한 묘비는 조선 전기에 지배층 위주로 설립되다가 중기 이후로는 일반화되기에 이르렀고, 규모와 양식도 다양하게 변화·발전하였다. 신도비와 묘갈은 조선 전기에는 봉분 및 기타 묘제석물들과 가까운 위치에 세워지다가 조선 중기 이후 묘역 입구나 묘역 아래에 약간 떨어져서 묘역임을 표시하는 역할까지 병행하게 된다.
1. 신도비
신도비는 대체로 전액(篆額)이나 제액(題額)에서 신도비라고 그 명칭을 밝히고 있다. 신도비문은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전액과 제액을 부여하고 찬자(撰者)·서자(書者)·전자(篆者)를 밝히며, 본문에는 주인공의 선조가 누구인지, 본인의 약력은 어떠한지 부인과 자손은 어떤 인물인지 집안 내력을 소개한 후 명(銘)을 읊어 슬픔과 그리움을 시로 짓고 마지막에 건립 연대를 밝힌다. 특히 조선 후기의 신도비는 묘역에서 서쪽으로 200m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묘의 위치를 밝히고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기능까지 병행하였다.
경기도 용인시에는 모두 20여 기 이상의 신도비가 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도학정치를 주장한 조광조[1482~1519]의 신도비(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소재, 향토유적 제2호, 총고 246㎝)를 들 수 있다.
조광조 신도비는 1585(선조 18)년에 건립된 것으로 좌의정 노수신(盧守愼)이 비문을 짓고[撰], 좌찬성 이산해(李山海)[1539~1609]가 썼으며[書], 김응남(金應南)[1546~1598]이 전(篆)을 올렸다. 원수방부 형태인데 대석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신은 단순하지만 정갈한 모습으로 조선 전기에 유행하였던 원수형 비신의 일반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조선 중기 17세기의 신도비로는 병조참판을 역임한 정윤복(丁胤福)[1544~1592] 신도비(용인시 처인구 포곡면 전대리 소재, 향토유적 제47호, 현 총고 331㎝)를 들 수 있다. 이는 1619년(광해군 11)에 건립되었는데, 처음 세웠을 때는 옥개방부 형식이었으나 현재는 머릿돌을 이수(離首) 형태로 보수하였다.
한편, 집현전 학사였던 이석형(李石亨)[1415~1477] 신도비(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소재, 총고 250㎝)는 청대리석의 자연 무늬가 그대로 살아있는 비신을 사용한 특이한 신도비이다. 1624년(인조 2)에 건립된 것으로 김상용(金尙容)[1561~1637]이 전액을 올리고, 이정구(李廷龜)[1564~1635]가 지었으며[撰], 신익성(申翊聖)[1588~1644]이 썼다[書]. 단아한 김상용의 전서체가 유난히 돋보이는 신도비로 원수방부 형태의 조선 전기 묘표 양식을 따르고 있다.
17세기 중반의 신도비로는 강직하기로 이름난 이유겸(李有謙)[1586~1663] 신도비(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 소재, 총고 317㎝)를 들 수 있다. 1669년(현종 10)에 건립되었는데,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지었고[撰]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썼으며[書], 민유중(閔維重)[1630~1687]이 전액을 올렸다.
3m가 넘는 방대한 크기에 폭이 68㎝이고 두께가 53㎝로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두꺼운 비신의 형태를 보이고 있어 독특하다. 전체적으로 옥개방부 형태이며 옥개석과 대석은 화강암으로 별도로 만들어져 끼웠다. 옥개석의 처마와 처마를 잇는 선은 거의 직선형에 가까우며 전각이 두툼하여 17세기 신도비의 양식을 잘 보이고 있다.
17세기의 마지막 신도비는 경기도와 용인의 대표적인 인물인 정몽주(鄭夢周)[1337~1392] 신도비(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소재, 경기도기념물 제1호, 총고 388㎝)이다. 정몽주 신도비는 정몽주의 몰년 직후 세워진 것이 아니라 후대인 1696년(숙종 22)에 입석한 것이다.
즉 후대에 그를 추모하여 당대 최고의 명사들이 직접 제작에 참여한 의미 깊은 신도비인데, 송시열이 지었고[撰], 김수증이 썼으며[書] 김수항(金壽恒)[1629~1689]이 전액을 올렸다. 또한 추기(追記)는 권상하(權尙夏)[1641~1721]가 기록한 뒤, 김진규(金鎭圭)[1658~1716]가 예서로 썼다.
그의 명성만큼이나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들이 모여 제작하였던 것이다. 매우 당당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17세기의 옥개방부 형태이다. 옥개석은 화강암으로 비신과 별도의 돌로 만들어졌고, 처마의 곡선이 직선적이나 처마 끝을 살짝 올려 마무리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도톰하게 양각하였으며 전각의 두께는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었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비교적 비문이 잘 보호되어 있다. 대석은 커다란 화강암인데, 대석 상면을 둥글게 마무리짓고, 상단 위에는 비신꽂이를 정갈하게 다듬었다.
18세기의 신도비로는 정응두(丁應斗)[1508~1572] 신도비(1728년,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1호, 총고 234㎝), 이만성(李晩成)[1659~1722] 신도비(1744년, 총고 271㎝), 정덕징(鄭德徵)[1657~1739] 신도비(1747년, 총고 287㎝), 이경증(李景曾)[1595~1648] 신도비(1774년, 총고 300㎝)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정응두 신도비는 아버지 정옥형 신도비와 함께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리에 있는데, 두 비 모두 근래에 고양시에서 이건해온 것이다.
금석문이 크게 유행한 19세기에 이르면 용인 지역의 신도비 건립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주국(李柱國)[1721~1798] 신도비(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 소재, 향토유적 제4호, 총고 340㎝)는 1800년(정조 24)에 건립된 것이다. 송환기(宋煥箕)[1728~1807]가 지었고[撰], 유한지(兪漢芝)[1760~?]가 전액을 올렸으며, 이재의(李載毅)가 썼다[書].
규모가 방대한 옥개방부 형태로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혔다. 비신은 오석으로 만들었고, 옥개석과 대석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옥개석은 처마 끝을 날렵하게 올려 경쾌하며,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다소 두껍고 높으나 유연한 곡선미가 돋보인다.
각 지붕마루의 끝에는 치두와 치미를 양각하였으며, 처마 안쪽으로는 지붕의 가구구조를 얕게 양각하여 사실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19세기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대석 역시 18세기 말에서 19세기적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문양을 넣지 않은 채 단순하고 대규모로 제작하였고, 대석의 상면만 둥글게 마무리지어 번잡한 조형을 피하였다.
19세기 또 하나의 대표적인 비는 김세필(金世弼)[1473~1533] 신도비(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소재,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2호, 총고 261㎝)이다. 1858년(철종 9)에 건립된 것으로 김도희(金道喜)[1783~1860]가 서하였고, 전액은 공간이 마련되었으나 쓰지는 않았다.
『경주김씨세보(慶州金氏世譜)』에 의하면 송시열이 지었고, 김진상(金鎭商)[1684~1755]이 쓰고 전액을 올린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전하지는 않는다. 신도비의 형태는 옥개방부의 조선 후기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신은 오석으로 제작되었으며 옥개석과 대석은 화강암이다. 옥개의 용마루와 처마와 처마를 잇는 곡선은 날렵하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두툼한 양각이고 처마 안쪽의 가구 표현은 전대보다 두껍게 표현되었다. 대석은 높고 크며, 문양은 배치하지 않았고, 대석의 사면의 각을 크게 깎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2. 묘갈(墓碣)
용인 지역에는 신도비 외에 묘갈의 형식을 갖춘 비석도 많이 유존하고 있다. 묘갈은 비석에 ‘묘갈’이라는 명칭을 주로 밝혔으며, 신도비와는 달리 품계에 특별한 제한이 없다.
규모나 형태, 건립 위치 등은 신도비와 유사하고 전액(篆額)·제액(題額)·찬자(撰者)·서자(書者)·전자(篆者)가 있는 것도 동일하나, 명(銘)이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용인시에는 모두 20여 기가 넘는 묘갈이 잔존해 있다.
조선 전기 묘갈로는 우선 윤진(尹珍)[1498~1545] 묘갈(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소재, 총고 250㎝)을 들 수 있다. 1588년(선조 21)에 건립된 것으로 정사룡(鄭士龍)[1491~1570]이 지었고[撰] 김노(金魯)가 썼다[書].
음기는 별도로 한호(韓濩)가 썼으며 최립(崔岦)[1539~1612]이 지었다. 김노나 한호 모두 당대의 명필로, 윤진 묘갈은 절대 연대가 부족한 서예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조선 초기의 옥개방부 형태를 지니고 있다. 지붕은 사모의 형태인데, 내림처마의 곡선이 완만하며, 전각을 살짝 올려 멋을 내었다. 단순한 형태지만 기품이 있는 묘갈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묘갈로는 오윤겸 묘갈과 이시직 묘갈을 들 수 있다. 오윤겸(吳允謙)[1559~1636] 묘갈(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소재, 경기도기념물 제104호, 총고 258㎝)은 1647년(인조 25)에 건립된 것이다.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지었고[撰],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썼으며[書], 전액은 없다.
원수방부 형태로 비신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대석의 앞뒤에는 커다란 당초문을 양각하였고, 상면에는 복련을 큼지막하게 배치하였다.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에 유행한 세장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한 것으로는 이시직(李時稷)[1572~1637] 묘갈(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소재, 높이 230㎝)을 들 수 있다. 1653년(효종 4)에 건립된 것으로 비신 앞면의 작은 예서는 김집(金集)[1574~1656]이 썼으며, 비신 음기는 김상헌이 지었고, 송준길이 서(書)와 전(篆)을 함께 하였다.
묘갈은 옥개방부 형태이며 비신만 대리석으로 제작하였다. 옥개의 처마선은 거의 직선을 이루고 있으며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간략하게 양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간략화된 형태를 이루고 있다.
1670년에 건립된 조행립(曹行立)[1580~1663] 묘갈(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덕성리 소재, 총고 214㎝)은 용인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이수방부 형식이다. 전액은 김만기(金萬基)[1633~1687]가 썼으며,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고, 송준길이 썼다.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가운데 있는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을 좌우대칭으로 양각하였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이수방부 형태를 갖춘 묘갈이다.
18세기의 묘갈로는 이예견(李禮堅)[1436~1510] 묘갈(1763년 개수,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소재, 총고 213㎝)과 이필중(李必重)[1672~1713] 묘갈(1764년, 용인시 기흥구 보라동 소재, 총고 310㎝), 이함(李涵 )[1682~1721] 묘갈(1765년, 총고 264㎝)이 있다.
이 시기의 묘갈의 비신은 대부분 오석으로 교체가 되는데 이들 묘갈은 이러한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모두 옥개방부 형태로 팔작지붕의 형태가 세밀화되면서 대석은 단순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19세기까지 계승되면서 조선 말기의 특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세기에는 이문주(李文柱)[1599~1662] 묘갈(1809년, 총고 156㎝)과 유복립(柳復立)[1558~1593] 묘갈(1825년, 총고 195㎝), 민승호(閔升鎬)[1830~1874] 묘갈(1899년)이 있다. 특히 민승호 묘갈은 김영수(金永壽)[1829~1899]가 지었고 민영환(閔泳煥)[1861~1905]이 썼는데, 근대풍의 옥개방부 형식을 갖추었다. 옥개석의 지붕마루는 얇고 볼록한 양각이며 지붕의 선은 가늘고 날렵하다. 비신은 18세기부터 유행하던 오석이며, 대석은 단순화하였다.
3. 묘표(墓表)
묘표는 신도비와 묘갈에 비하여 규모가 현저하게 작고, 주로 봉분 앞에서 묘주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실용적인 묘비이다. 품계에 따른 건립 제한이 없어 일반 서민까지 모두 제작할 수 있었고, 전액이나 제액을 별도로 부여하지 않는다.
양기(陽記)에는 묘주의 벼슬과 이름을 간단히 적고, 음기(陰記)에는 주인공에 대한 약력과 선조, 부인 및 자손에 관한 간단한 소개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찬자·서자 등은 음기에 기술하기도 하고 생략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묘표는 신도비와 묘갈이 묘주의 몰년과 차이가 나게 후대에 많이 건립하는 것에 비하여, 비교적 몰년과 유사한 시기에 제작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묘역에 배치된 기타 석물들의 연대 추정의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용인 지역에는 조선시대 분묘가 150여 기 이상 존재하기 때문에 대부분 묘표가 유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중 태조의 부마인 이애(李薆)[1363~1414]와 경신공주(慶愼公主) 묘표는 태종대(1400~1418)에 세워진 매우 이른 시기의 묘표로 고려시대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양 봉분 앞에 한 쌍으로 건립된 이 묘표는 옥개방부 형태지만 비신은 말각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형식으로 경기도에서 매우 드문 형태이다.
조선 전기에는 원수방부형이나 화관방부형, 단순한 옥개방부형 등의 묘표가 크게 유행하였는데, 연안부부인 전씨 묘표(16세기 초), 정몽주 묘표(1517년), 조광조 묘표(16세기 후반) 등이다.
조선 후기에는 신도비 형태와 유사하게 옥개방부 형태와 원수방부 형태가 주를 이루었는데, 옥개석은 보다 화려하고 날렵해지고, 원수형은 보다 단순해지는 특징을 보인다. 이중인 묘표(1705년), 정상 묘표(1726년), 유형원 묘표(1768년), 조중회 묘표(1786년) 등은 원수방부형의 단순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특히 18세기 말부터는 이러한 단순화된 원수방부형이 더욱 대중화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에 비해 오명항 묘표(1793년), 채제공 묘표(19세기 전반) 등은 옥개방부형의 대표적인 예이다.
4. 선정비(善政碑)
선정비는 마을 수령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우던 비석이다. 선정비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청간애민선정비(淸簡愛民善政碑) 등으로 불렸다. 용인에는 20여 기 이상의 선정비가 유존하는데, 대부분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선정비는 대부분 마을 입구에 여러 기를 모아서 세우게 되는데, 용인에는 양지면의 선정비군, 마북리 선정비군, 죽전동 선정비가 남아 있다. 그 중 양지면에는 모두 7기의 선정비가 있는데, 이용신(李龍臣)·이도연(李道淵)·정순조(鄭順朝)·전광석(全光錫)·이헌문(李憲文)·박창근(朴昌根)·남계술(南啓述)의 선정비이다. 대부분 18세기부터 19세기의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선정비로 모두 원수방부 형태이다.
이에 비해 기흥구 마북동 선정비군은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는 모두 13기가 모여 있는데, 원수방부·옥개방부·이수방부 형태의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시기는 모두 18~19세기경이다. 김녕한(金寗漢)·이원일(李源一)·김홍집(金弘集)·박응종(朴應鐘)·민영준(閔泳駿)·류봉휘(柳鳳輝) 등의 선정비가 있다.
5. 효자열부비(孝子烈婦碑)
조선시대에는 타인에게 귀감이 될만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효자·열녀·효부 등에게 각종 표창비를 내렸다. 용인에는 효자비와 열부비가 4기 있는데, 정한영(鄭漢永) 효자비, 김사철(金士喆) 효자비, 김상익(金相益) 효자비, 강화최씨 열부비가 있다. 대부분 원수방부형 또는 옥개방부형이나 최근에 보수를 가한 것이 많아 변형되었다.
6. 기타
앞에서 열거한 석비 외에도 하마비(下馬碑)가 있는데, 하마비는 궁궐·종묘·문묘·향교 등 예를 갖추어야 할 장소를 지날 때 말에서 내려 공손한 마음으로 지나가라는 의미의 비석이다.
용인에는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생모인 연안부부인전씨(延安府夫人田氏) 묘소 앞과, 심곡서원(深谷書院), 정몽주 묘소 앞, 용인향교 하마비가 있다. 대부분 작은 규모의 원수방부형의 단순한 형태이다.
이 외에도 주목해야 할 비석이 있는데, 채제공(蔡濟恭)[1720~1799] 뇌문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76호)이다. 뇌문비는 죽은 사람의 덕행을 찬양하여 그 명성을 전하게 하는 비석을 말한다. 채제공 뇌문비[용인시 역북동, 총고 255㎝]는 채제공 사후 정조가 친히 내린 어제문을 비신에 각자하였다고 한다.
전액과 뇌문을 쓴 인물은 기록하지 않았고, 18세기 말경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지역의 특색 있는 비석이다. 옥개방부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비신은 짙은 색깔의 오석이다.
오달제 대낭장비(吳達濟 帶囊藏碑)[향토유적 제3호,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소재, 총고 311㎝]라는 이색적인 석비도 주목할 만하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하다가 청으로 끌려가 죽음을 당한 오달제의 시신이 돌아오지 못하자, 그 후손이 유품인 허리띠와 주머니로 장사지내어 이름을 ‘대낭장(臺囊藏)’이라고 지었다.
1828년(순조 28) 에 건립하였으며 김조순(金祖淳)[1765~1832]이 지었고, 이상황(李相璜)[1763~1841]이 썼으며 김사목(金思穆)[1740~1829]이 전액을 올렸다. 옥개방부 형식의 전형적인 19세기 형식을 갖추고 있다.
[현황]
경기도 용인시는 분묘 문화가 유난히 발달하여 현재 석비는 유교 문화에서 파생된 성격이 대부분이다. 현존 묘비는 조선 후기의 것이 많고, 그 중에서도 18~19세기에 집중해서 많이 제작되었다. 형태도 조선 전기의 이수나 귀부가 있는 형태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단순한 옥개방부·원수방부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경기도는 조선 전기부터 한양 주변에 사대부 분묘를 많이 조성한 역사적 특징을 지닌 지역으로, 특히 용인 지역은 조선 후기에 집중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이르러 무분별한 신도시 개발과 도로 개발 등으로 인해 문화유적의 현상 변경이 급격히 빈번해지고 있다.
특히 석비의 이동이 잦은데, 용인에서 있다가 남양주로 옮겨간 석비, 고양에서 용인으로 옮겨온 석비 등 문화재 변형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때로는 후손들에 의하여 개보수가 이루어지면서 원형이 변형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가능한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장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특히 원래의 돌을 새로운 돌로 전환하는 경우가 종종 목격되는데, 원래의 돌이 부식 상태 등이 심하다면 문화재 전문 보수과정 등을 거쳐 가능한 원형을 보존하도록 하는 것이 미래에 후손들에게 상속하여야 할 중요한 문화재를 보존하는 최소한의 과제라고 생각된다.
[의의]
석비(石碑)는 대부분 절대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문헌사·역사학·서예사·민속학·금석학 등 여러 분야의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된다. 또 비의 구조와 양식 등은 미술사의 자료가 되고, 문헌 자료가 부족한 경우 대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용인 지역의 석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양이나 질적으로 우수한 석비가 많고, 제작자로 당대 유명한 석학이나 서예가들이 대거 참여해 많은 필체를 남기기도 하여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의미 깊은 비(碑)가 많이 잔존하고 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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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3 | 행정지명 현행화 | 모현면에서 모현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
2012.01.04 | [개설] 수정 | 고려시대의 서봉사 현오국사비를 제외하고는 ->고려시대의 서봉사 현오국사탑비를 제외하고는 |
2012.01.04 | [조선시대의 비] 수정 | 2) 한편, 집현전 학사였던 이석형(李石亨)[1415~1477] 신도비(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소재, 총고 250㎝)는 ->한편, 집현전 학사였던 이석형(李石亨)[1415~1477] 신도비(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소재, 총고 250㎝)는 3) 18세기의 묘갈로는 이예견(李禮堅)[1436~1510] 묘갈(1763년 개수, 용인시 기흥구 소재, 총고 213㎝)과 ->18세기의 묘갈로는 이예견(李禮堅)[1436~1510] 묘갈(1763년 개수,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소재, 총고 213㎝)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