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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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영어음역 | Cheonjugyo |
영어의미역 | Catholicism |
이칭/별칭 | 가톨릭,구교,성당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용복 |
[정의]
경기도 용인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
[개설]
17세기 조선의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하면서 당시 중국에 진출해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만나 서양의 과학 기구와 각종 서적들을 얻어 가지고 귀국하게 되는데, 이것이 서양 선교사들과 공식적으로 접촉하는 출발점이었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영세를 받고 천주교 서적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친구 이벽에게 자신이 얻어온 책들을 건네주고, 주변의 인물들에게 영세를 주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천주교의 교리를 공부하고 영세를 받은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비로소 조선 천주교회가 시작되었다.
1886년 한국과 프랑스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고 난 후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천주교는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에 협력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하였다. 1960년대 초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1962년의 교계 제도 설정은 독자적인 한국 천주교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한국의 천주교는 꾸준한 증가세를 보여, 2006년 말 현재 신자 수 4,768,000여 명, 본당 수 1,476개가 되었다.
[전래 및 변천]
용인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초기의 장소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다만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신해박해를 피해 충청도에서 현 이동읍 묵리 광파리골[현 한덕골성지]로 피신하여 일시 생활하였다 한다. 이후 현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골배매실[배매실성지]에 생활하면서 양지면 평창리 은이[은이성지]에서 교우들이 모여 기도와 예배를 모셨던 곳이 용인 초기 천주교 전래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용인 지역의 과거 교우촌으로는 처인구에 모현읍 오산리, 양지면 대대리, 포곡읍 금어리, 원삼면 학일리, 해곡동 등이 있으며 그리고 수지구 동천동 손골에 교우촌을 이루었다. 특히 처인구 이동읍 서리 사리틔에는 19세기 말 권일신 후손들이 이주하여 교우촌을 이루었었다. 과거 교우촌에는 교우들이 생계유지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그릇을 굽던 도요지가 있어 생활상을 말해주고 있다.
용인 지역 최초의 천주교 본당은 안성의 미리내 본당에서 분리되어 나온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의 압고지 본당이었다. 1927년 9월 14일에는 내사면, 즉 지금의 양지면 남곡리에 남곡리 본당(현 양지 본당)이 역시 미리내 본당으로부터 분리되어 설정되었다.
그러나 1930년 압고지 본당은 폐지되고 다시 공소가 되어 남곡리 본당으로 편입되었다. 당시 남곡리 본당의 관할 지역은 용인군 지역보다도 광주군 지역이 더 많았다. 그러다가 1941년 이천 본당이 분리되어 이천·광주 지역은 이천 본당에서 관리함으로써 남곡리 본당은 용인 지역을 관리하는 본당으로 남는다.
1957년 이동읍 천리 적동마을에 적동성당이 건립되었다. 적동마을은 이동읍 묵리와 인접한 마을로 19세기부터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도 공소를 이루었던 마을이다. 그리고 적동마을에 인접한 한덕골 성지가 있으며 특히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미리내로 모신 이안시오 님이 살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적동성당은 1970년대 교우 수가 줄어 용인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가 1997년 천리성당을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8년에 당시의 용인읍 김량장리에 성당을 신축하고, 이듬해인 1959년 6월 5일 용인본당이 설립됨으로써 용인 지역에 또 하나의 본당이 생겨났다. 1963년에는 수원교구가 새로 설정되면서, 이 두 본당은 과거 서울교구에서 수원교구 소속 본당으로 변경되었다.
1988년 2월에는 수원의 지동본당에서 분리된 신갈본당이 지금의 용인시 기흥구 신갈동에 설립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수지·구성 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새로운 신도시들이 들어서면서 많은 인구가 몰리자 용인군이 도농 복합 형태의 시로 승격되었다. 자연히 천주교인들의 숫자도 불어나게 되고, 이에 따라 본당도 여러 곳에 속속 새로 설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황]
2006년 12월 기준으로 용인 지역은 22개 본당에 신자수가 70,068명으로 용인시 전체 인구의 약 11% 내외에 이르고 있다. 용인 지역 본당 가운데 영통 성령본당과 영통 영덕본당은 용인 지역에 본당이 있으면서 수원의 일부 지역까지 관할하고 있다.
주요 성당으로는 기흥구에 구성성당(2001.1.30)·신갈성당(1988.2.24)·영통성당(1981.1.30)이 있고, 처인구에 모현성당(2000.1.25)·선봉성당(1973.1.29)·송전성당(1994.1.1)·양지성당(1836.4)·용인성당(1959.6.5)·송전성당(1995)·천리성당(1997.2.14)이 있으며, 수지구에 수지성당(1994.2.3)·죽전성당(1998.5.3)이 있다. 2011년 현재 용인의 천주교 성당은 용인 대리구 소속하에 24개 성당이 있고 수원 대리구 소속하에 3개 성당이 있어 총 27개 성당이 있다.
천주교 복지 시설로는 생명의 집·성가원·성심원·영보자애원·요셉의 집·요한의집·인보마을이 있다. 관련 단체로는 성모영보수녀원과 피정의집·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인보성체수녀회·적동수녀원·파티마성모프란치스코수녀회가 있다. 주요 성지로는 손골성지·은이성지·골배마실·한덕골 등이 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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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3 | 행정지명 현행화 | 모현면에서 모현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
2012.01.08 | 본문 수정 및 추가 | 1) 용인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초기의 장소는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 위치한 은이성지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초기 천주교 마을이었으며,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과 그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1827년 이주해 생활한 곳이다. 또한 1836년 1월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인 모방(Maubant) 신부가 용인 지역에서는 최초로 미사를 지낸 곳이다. 수지구 동천동 지역도 용인 지역의 유서 깊은 천주교 마을로 알려져 있다. ->용인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초기의 장소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다만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신해박해를 피해 충청도에서 현 이동면 묵리 광파리골[현 한덕골성지]로 피신하여 일시 생활하였다 한다. 이후 현 처인구 양지면 평창리 골배매실[배매실성지]에 생활하면서 양지면 평창리 은이[은이성지]에서 교우들이 모여 기도와 예배를 모셨던 곳이 용인 초기 천주교 전래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용인 지역의 과거 교우촌으로는 처인구에 모현면 오산리, 양지면 대대리, 포곡읍 금어리, 원삼면 학일리, 해곡동 등이 있으며 그리고 수지구 동천동 손골에 교우촌을 이루었다. 특히 처인구 이동면 서리 사리틔에는 19세기 말 권일신 후손들이 이주하여 교우촌을 이루었었다. 과거 교우촌에는 교우들이 생계유지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그릇을 굽던 도요지가 있어 생활상을 말해주고 있다. 2) [전래 및 변천] 추가 1957년 이동면 천리 적동마을에 적동성당이 건립되었다. 적동마을은 이동면 묵리와 인접한 마을로 19세기부터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도 공소를 이루었던 마을이다. 그리고 적동마을에 인접한 한덕골 성지가 있으며 특히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미리내로 모신 이안시오 님이 살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적동성당은 19070년대 교우 수가 줄어 용인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가 1997년 천리성당을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용인성당(1959.6.5)·천리성당(1997.2.14)이 있으며, 수지구에 수지성당(1994.2.3)·죽전성당(1998.5.3)이 있다. ->용인성당(1959.6.5)·송전성당(1995)·천리성당(1997.2.14)이 있으며, 수지구에 수지성당(1994.2.3)·죽전성당(1998.5.3) 등이 있다. [현황] 추가 2011년 현재 용인의 천주교 성당은 용인 대리구 소속하에 24개 성당이 있고 수원 대리구 소속하에 3개 성당이 있어 총 27개 성당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