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2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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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大建 |
영어음역 | Kim Daegeon |
이칭/별칭 | 재복(再福),지식(芝植),대건(大建)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현범 |
[정의]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순교자로 용인에서 성장한 인물.
[가계]
본관은 김해. 증조부는 김진후(金震厚)[비오, 1738~1814], 할아버지는 김택현(金澤鉉), 아버지는 김제준(金濟俊)[이냐시오, 1796~1839]이고 어머니는 장흥고씨 우르슬라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김재복(金再福), 족보에 올려진 이름은 김지식(金芝植), 어른이 되었을 때의 이름은 김대건(金大建),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활동사항]
충청도 솔뫼(현재 충청남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나 7세 때인 1827년(순조 27) 정해교난을 피해 용인의 광파리골[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묵리 한덕골]로 이주한 후 골배매실[현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로 다시 이주하여 같은 남곡리 교우촌인 은이(隱里) 마을에서 기도와 예배를 드리며 성장하였다. . 그의 집안은 증조부 김진후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1814년 순교하였고, 아버지도 1839년(헌종 5)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하는 등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다.
김대건(金大建)은 1836년(헌종 2) 용인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隱里]공소’를 방문한 프랑스 선교사 모방(Maubant)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1837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파리외방전교회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서양 학문을 배웠다.
1842년 수업을 끝낸 다음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고국에 밀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845년 조선 입국을 위하여 상하이[上海] 연안의 금가항(金家巷)신학교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충청남도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여 각지를 순방하며 전도하였다. 특히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서울, 경기(용인) 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활동을 하였다.
1846년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명령을 받고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선교부와 신부들에게 보내는 편지 및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작성하였고, 9월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이튿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졌다. 사형당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거두는 사람없이 버려져 있음을 알게 된 이 안시오[현 처인구 이동읍 거주]가 혼자서 남의 눈을 피해 밤에만 운구하여 미리내[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857년(철종 8)에 교황청에 의해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고, 1925년 복자위(福者位)에, 1984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위(聖人位)에 올랐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인 2021년의 유네스코 기념 인물로 선정되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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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6 | 내용 현행화 | [상훈과 추모] 추가: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 |
2019.05.16 | 행정지명 현행화 | 이동면에서 이동읍으로 변경 사실 반영 |
2012.01.09 | [메타데이터] 추가 본문 수정 | 1) 이칭별칭 재복(再福)|지식(芝植)|대건(大建) -> 이칭별칭 재복(再福)|지식(芝植)|대건(大建)|안드레아 2) 피해 용인의 골배마실(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피해 용인의 광파리골[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 한덕골]로 이주한 후 골매매실[현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로 다시 이주하여 같은 남곡리 교우촌인 은이(隱里) 마을에서 기도와 예배를 드리며 성장하였다. 3) 상하이[上海] 연안의 금가항(金家巷)으로 가서 ->상하이[上海] 연안의 금가항(金家巷) 신학교에 가서 4) 군문효수형에 처해졌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되었다. ->군문효수형에 처해졌다. 사형당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거두는 사람없이 버려져 있음을 알게 된 이안시오[현 처인구 이동면 거주]가 혼자서 남의 눈을 피해 밤에만 운구하여 미리내[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