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렴산 독립만세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79
한자 珠簾山 獨立萬歲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을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17일연표보기 - 주렴산 독립만세운동 발생
발생|시작 장소 주렴산 독립만세운동 - 충청남도 보령군 주산면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이철원|유호근|윤석봉|유준근|박윤화|이철규|이성수

[정의]

1919년 4월 17일에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 있는 주렴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

[역사적 배경]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항일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서도 유호근(柳浩根)[1853~1925], 윤석봉(尹錫鳳)[1842~1910] 등이 의병에 격려문 발송 등의 활동을 하였다. 윤석봉은 1906년 1월 19일 최익현을 접견하고 보령으로 돌아와 지방 유생들과 함께 ‘을사 5적에게 죄를 내리고 조약을 윤허치 말 것’을 주청하였다. 이어 재차 상소를 통하여 왜의 사령부에 잡혀 있는 선비들의 방환(放還)[귀양살이하는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내던 일]을 아뢰어 청하기도 하였다.

또한 을사조약 체결 직후 보령시 남포 지역 유림들은 을사조약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며 세금을 을사 5적이 있는 정부에 납부하지 말고 유회를 통하여 궁내부에 납부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14년 독립의군부 충청도 대표로 유준근(柳濬根)[1860~1920] 등을 내세웠다. 이와 같이 일본의 침략에 대한 유림들의 항일 활동은 보령 지역의 항일 의식으로 전개되었으며, 독립운동의 밑바탕이 되었다.

[경과]

1919년 4월 17일 주산면에서는 배재학당 학생인 이철원(李哲源)[1900~1979]이 동지 5명을 규합하여 증산리와 그 밖에 2개소 산 위에서 큰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주렴산 독립만세운동주산면 증산리 출신인 이철원이 배재학당에 다니던 중 서울의 만세 운동을 알리기 위하여 고향에 내려왔다가 동지들을 모아 이끈 고향의 만세운동이었다.

이철원은 유림 동지들을 규합하고 간개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를 부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시장 일대에 경찰 수비대들의 경계가 삼엄하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4월 17일 밤 주렴산 국수봉에서 횃불을 올려 태극기를 꽂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혈서를 서명한 후, 징을 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만세 소리를 들은 인근 마을 주민들도 합류하였으며, 주렴산을 내려와 웅천 읍내를 향하여 2㎞ 정도 만세 행진을 벌였다.

[결과]

소식을 접한 일본 경찰들이 출동해 만세 군중들을 제지하고 주도 인사들을 검거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뒤이어 4월 18일 밤에 전개하고자 하였던 독립운동이 주도 인사들의 체포로 실행에 옮길 수 없게 되자, 박윤화(朴奫和)[1867~1940] 혼자서 다음날인 4월 18일 새벽에 복개봉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는 일도 일어났다.

[의의와 평가]

보령 지역의 유림들은 의병 활동을 통하여 항일 민족의식을 표출하였고, 일본과 친일 정부에 납세를 거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보령 지역의 3·1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지 않았는데, 이는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던 유준근, 백관형 등 보령 지역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보령 지역이 1910년대 충청남도에서 군세가 약했던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감시 경계 활동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삼엄하여 독립운동이 사전에 일본 경찰에 의하여 저지된 경우가 많은 까닭도 한 원인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참고문헌]
  • 『보령시지』(보령시지편찬위원회, 2010)
  • 『충남독립운동사』(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2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http://www.grandculture.net)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