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4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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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婚禮 |
영어음역 | hollye |
영어의미역 | marriage ceremony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장정룡 |
[정의]
결혼을 치르는 과정의 전통의례.
[명칭유래]
혼례(婚禮)에 ‘어두울 혼(昏)’자가 들어가듯이 옛날에는 저녁에 치르는 행사였다. 과거 고대사회에서는 아내를 사오던 동옥저의 구매혼인 민며느리제와 신랑이 처가살이를 하는 고구려의 서옥제가 있었다.
[연원]
『삼국지』 「위지 동이전」 동예조(東濊條)에 의하면, 고대사회에서도 같은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못했으며 혼로(婚路)가 먼저 정해져 있어 지역과 신분에 맞추어 혼사를 거행했음을 알 수 있다. 강릉에서는 가능하면 혼로가 대관령을 넘지 않는 것을 선호하여 가까운 영동 지방 내에서 통혼을 하였다. 남쪽으로는 동해 망상, 북쪽으로는 양양 남대천을 넘지 않을 정도라 하였다. 따라서 씨족 간 중혼(重婚) 현상이 두드러져 소위 ‘겹사돈’이 많은 편이다. 신분상 동성동본인 경우는 제한이 있었으나 동성이본인 강릉최씨의 경우는 통혼을 하며, 강릉김씨의 경우는 수성최씨나 김천김씨와는 통혼을 하지 않으며, 외가로는 10촌이 넘어야 통혼하다고 한다. 강릉 지역 혼례에서 문벌, 자산, 적서(嫡庶) 등을 따지는 것은 다른 지방과 같으나 사색당파에 따른 색목(色目)을 별다르게 중시하지 않으며 뚜렷한 계보가 있더라도 통혼만은 무관한 것이 특색이라고 지적한다.
[절차]
혼례의 절차상 맨 처음 과정은 의혼(議婚)으로, 이것은 중신애비를 내세워 양가의 집안 근본, 배우자 성품, 건강, 재산, 학력 등을 알아보는 것이다. 강릉 속담에 “며느리는 낮게 보고 딸은 높게 줘라”고 하는데 이러한 사정은 타 지역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강릉 학산 지역에서는 중신애비를 남성 여성 각각 한 명씩 내세우는데, 중신애비들은 일부러 신부에게 말을 걸어보거나 물 한 그릇을 청하여 태도를 살피기도 한다. 결혼이 성사되면 중신애비에게 옷이나 신발을 선물하고 일정한 금액을 사례한다. 근래는 결혼할 당사자가 먼저 사귀고 부모의 허락을 얻는 경우가 많으나 이 지역에서는 부모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다고 한다.
예서(禮書)에서는 혼인이 결정되면 육례를 갖춘다고 하는데, 순서상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폐(納幣), 청기(請期), 친영(親迎)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납채의 과정을 보면, 우선 양가의 결혼이 결정되면 신랑의 생년월일시를 쓴 사주(四柱)를 보내서 약혼의 징표로 삼는다. 사주는 사성(四星)이라고도 하는데 가정이 화목한 사람을 골라 택일하여 청혼서를 보내기도 하고 중신애비를 통하기도 한다.
신랑의 집안에서 사주를 보내면 신부의 집에서 택일을 하여 연길(涓吉)을 보낸다. 강릉의 사주단자는 신랑의 생년월일시를 간지에 맞게 백지에 내려쓰고 왼쪽부터 다섯 번 접어서 봉투에 넣고 봉투는 근본을 세 번 씌우고 싸릿대를 잘게 쪼개 그 사이에 끼운 다음 청홍실로 상하 전후로 길게 늘여 감아 넘기고, 파란색이 겉으로 나오도록 매듭 없이 매는데 이것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는 월노승(月老繩)이다.
혼례를 올리는 당일 즉 전안례(奠雁禮)를 올리는 날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떠나는 것을 친영(親迎)이라 한다. 친영 때 신랑을 인도하고 대표로 가는 사람을 상객 또는 웃손이라 하며 후행으로 함애비, 새손들이 따른다. 신랑 일행이 신부 마을에 도착하면 사초에 든다. 사초는 사처(舍處)라고도 하며 상객과 신랑이 예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함애비가 함을 드린다. 이때 신부의 집에 와서 “함 들이시오”라고 세 번 외치고 들어가 등 뒤로 함을 얹으면 신부 오빠가 함을 안방으로 가지고 간다. 이 함을 발로 세 번 차고 보자기를 푼 다음 눈을 감고 신부 옷을 꺼내 치마폭으로 감싸 담는다. 옛 속언에 “남자가 장가가는 데는 치마 두 끝만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하나는 함 속의 치마감 끝을 당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부의 치마 끝을 말한다.
관대를 한 신랑은 기러기를 안고 전안청에 이르러 북쪽을 향해 목안(木雁)을 상 밑 땅에 내려놓는다. 이것이 전안례이다. 신랑은 천상배를 네 번 한 다음 돌아서고 마당에 교배상을 차린다. 교배상에 나와서 신부가 재배하면 신랑이 답하여 재배하고 신부가 다시 재배하면 신랑이 읍을 하고 난 후 각기 꿇어앉는다.
상견례가 끝난 다음 술잔에 술을 부어 신부의 입에 대었다가 신랑에게 넘겨주면 다시 보내기를 세 번 하는데 안주는 소매에 밤과 대추를 넣는다. 합근례(合巹禮)가 끝나면 반절을 하고 신랑은 방에 들어가 관대를 벗는 ‘관대벗김’을 한다. 그 다음 신랑은 아버지에게 큰절을 하고 다른 방에서 큰상을 받는다. 당일 신랑은 신부의 집에서 초야를 보내는데 이것은 강릉의 풍속이다.
다음날 아침 신부가 시가(媤家)에 처음 가는 신행을 우귀(于歸)라 한다. 신부의 가마가 집안에 들어서면 소금이나 재, 명주씨를 뿌려 부정을 막고 불을 타넘게도 한다. 신랑은 마구간에 가서 바가지에 담은 국수를 먹고 신부는 대반상을 받는다. 상을 다 받은 후에는 시부모와 일가에게 인사를 드리는 현구고례(見舅姑禮)가 있다. 이것이 끝나면 “알묘한다”며 조상의 사당에 가서 제사를 드린다. 알묘가 끝나면 처가로 재행을 하는데 이튿날 용떡으로 떡국을 해먹고 사흘 안에 재향을 하면 신부 측 마을청년들이 모여서 ‘신랑매달기’를 한다. 신랑매달기는 동상례(東床禮)라 하며 동상, 즉 사위를 맞는 신부집에서 이들을 대접하는 예로서 신랑의 발을 묶어 거꾸로 매달고 발바닥을 때리는 것이다. 신랑을 매달러 갈 때는 왁달계패를 조직하여 왁달계 노래를 부른다.
강릉에서는 결혼을 한 신부가 시가에 가지 않고 친정에 눌러 수개월 또는 반년 이상을 지내기도 하는데 이것을 “여름난다”고 한다. 이때 시집살이할 준비를 하는데 각종 포목으로 옷을 만들고 평생 입을 옷을 짓기도 한다. 이렇게 여름이 지나 가을되면 혼수를 챙겨 일 년이든 반년이든 결혼 후에도 왕래하다가 아주 시댁으로 의농(衣籠)을 싣고 가기도 하였다. 이렇게 준비가 끝난 다음 시댁으로 가는 것을 ‘풋보기’ 또는 ‘풀보기’라 한다.
[옷차림]
혼례복은 전통적인 복색으로 신랑은 벼슬을 했건 안 했건 옛 관복을 입는데, 허리에는 서대를 띠고 머리에는 사모를 쓰며 목화를 신는다. 안에는 고의와 속적삼을 입고 그 위에 조끼, 마고자에 두루마기를 걸친 다음 도포를 입는다. 두루마기는 연두색에 남전복, 저고리는 보통 옥색, 마고자는 보라색 등 화려한 편이다. 신부의 차림은 다홍 겉치마 남색 속치마 단속곳, 저고리, 적삼, 원삼, 족두리, 용잠, 뒷댕기, 앞댕기를 한다. 강릉에서는 사주단지 외에도 ‘의양단자(衣樣單子)’를 동봉하여 신랑신부 가정에서 치수가 적힌 옷 모양의 종이인형을 서로 교환하여 미리 만들도록 하였다. 또한 강릉에서는 ‘여름살이’라 하여 결혼예물을 건네준 사람에게 특별히 여름옷을 지어 보내기도 한다.
[상차림]
전안례의 교배상은 대나무와 소나무 가지를 꽂은 화병 2개, 용떡 2그릇, 황초 2개, 밤, 대추, 곶감, 포 각각 1그릇, 팥과 콩시루 2개, 청홍실을 목에 건 닭 2마리를 진설한다. 현구고례의 경우 신부 측에서는 밤, 대추, 엿장반, 건치장반, 과일, 술, 감주 등을 장만한다. 또한 강릉에서는 ‘질알구미’ 또는 ‘길알금’이라 하여 “길을 알려준다”는 뜻으로 인사를 한다. 이것은 신부가 결혼 후에 시댁에 처음 가면서 찰떡, 국수, 소갈비, 과일 등을 상자에 넣어 지게로 져서 보내는 것으로 형편에 따라 규모가 다르다.
폐백상은 홀수로 올리고 보통가정에서는 3~5첩을 하는데 주로 닭과 엿을 중심으로 꼽고 대추, 밤, 약과, 유과 어물, 감주, 곡주, 곶감쟁반, 안주구절판 등을 놓는다.
[현황]
현재 강릉 지역에서는 전통혼례를 거행하는 경우가 드물고 폐백만 전통혼례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