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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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宣城義陣 |
영어음역 | Seonseonguijin |
영어의미역 | Seonseong Loyal Troops Unit |
이칭/별칭 | 예안의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강윤정 |
[정의]
근대 개항기 안동 예안 지역에서 결성된 항일 의병 부대.
[역사적 배경]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해 1895년(고종 32) 말부터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안동 예안 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는데, 선성의진은 1895년 12월 초에 시작되었다. 예안의병은 1895년 12월 30일(음 11월 15일)에 내려진 단발령이 계기가 되어 촉발되었으며,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발단]
단발령이 예안 지역에 문서로 도착한 때는 1896년 1월 11일(음 1895년 11월 27일)이었다. 단발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안동 지역에서는 의병 봉기를 위한 통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안통문」을 시작으로 「삼계통문」과 「청경통문」·「호계통문」 등 의병 소통문이 발의되었다. 이 가운데 선성의진이 결성되는 발단이 된 「예안통문」은 1896년 1월 13일(음 1894년 11월 29일)에 발의되었으며 모두 223명이 서명하였다.
[경과]
선성의진은 1차, 2차, 3차, 4차에 걸쳐 결성되었다. 1차 의진은 1896년 1월 23일(음 1865년 12월 9일)에 결성되었으며, 결성과 해산을 거듭하면서 모두 네 명의 대장이 취임하였다. 하계마을의 이만도가 대장으로 추대되고, 이중린이 부장을 맡았다. 선성의진은 결성되자마자 안동의진이 관군과 싸우다가 크게 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동요한 병사들이 흩어지면서 결성된 지 9일 만인 2월 1일 해산하였다.
이에 이중린이 의진을 다시 추슬러 2차 의진을 결성하였다. 온혜마을 출신으로 1차 의진의 부장이었던 이중린은 자신의 토지를 팔아 의병 자금을 마련한 뒤 청량산을 근거지로 삼아 항전을 펼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2차 의진의 대장에 취임하였다. 2차 의진은 호좌·풍기·순흥·영주·봉화·예천·예안 7읍의 연합 의진에 참가하여 태봉전투를 벌였다. 상주 함창의 태봉은 대구에서 충주로 연결되는 일본군 병참선상의 일본군 수비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3월 20일(음 1월 27일) 선성의진 중군 김석교(金奭敎)가 이끈 선발대가 예천으로 향했고, 3월 26일(음 2월 13일) 백마의 피로 맹세하는 회맹(會盟) 의식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이때 김석교가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중군을 김도현으로 바꾸었다. 한편 중군 김도현, 선봉장 이인화, 전방장 이중언이 이끄는 선성의진 본대는 3월 28일 산양에 도착했다. 바로 이날 밤 호좌의진과 일본군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3월 29일 아침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자, 선성의진은 태봉 공격에 앞장섰다. 그러나 연합 의진은 저녁 무렵 일본군의 총공격에 밀려 퇴각하였고, 선성의진도 학가산을 거쳐 회군하여 3월 31일(음 2월 18일) 예안으로 돌아왔다.
태봉전투를 치르고 예안에 머물던 2차 선성의진은 청량산으로 들어가 전열을 갖추었으나, 청량산 본거지마저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이때 청량산의 청량사(淸凉寺)와 오산당(吾山堂)도 화공으로 인하여 소실되었으며, 또한 이보다 하루 앞서 퇴계 종택도 일본군이 불을 질러 건물 일부와 책 1,400여 권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9월에 들어서면서 3차 선성의진이 결성되었다. 3차 의진의 대장에는 2차 의진의 본거지가 무너진 뒤에도 다섯 달 동안 조직을 이끌어 온 이인화가 추대되었다. 이인화는 온계(溫溪) 이해(李瀣)의 종가인 삼백당(三柏堂)에 의병소를 설치하고, 9월 5일(음 7월 28일) 마침 예안 부포에 머물던 김도현과 앞으로 활동 방향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9월 6일 관군 40여 명이 기습 공격을 하여 선성의진은 흩어지고 삼백당도 소실되었다.
3차 의진이 괴멸된 뒤 다시 이계양의 종손인 이찬화가 의진을 결집하였다. 이찬화는 9월 7일(음 8월 1일) 의진을 수습하고 안동 수비대를 추격하였다. 그 후 9월 중순경에 예안 지역에서 한 차례의 전투를 펼쳤는데, 이것이 선성의진의 마지막 전투였다.
[결과]
선성의진은 9월 20일 이찬화가 이끄는 4차 의진이 해산하면서 막을 내렸다.
[의의와 평가]
선성의진은 어느 지역보다 강렬하고 장기간에 걸쳐 전개되었다. 그리고 선성의진의 대장들과 참여자들의 항전은 국권피탈 이후에 독립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향산 이만도와 이중언은 자결 순국을 통해 항일 의지를 높였고, 일부는 계몽운동으로 전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