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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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晩燾 |
영어음역 | Yi Mando |
이칭/별칭 | 관필(觀必),향산(響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강윤정 |
성격 | 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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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
성별 | 남 |
생년 | 1842년 |
몰년 | 1910년 |
본관 | 진성 |
대표경력 | 선성의진 의병장 |
[정의]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
[개설]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이다. 1842년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11세손이며, 만화공(晩花公)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이휘준(李彙濬)이며, 이휘철(李彙澈)에게 입양되었다.
[활동사항]
이만도(李晩燾)는 23세 되던 1866년(고종 3) 식년시에 장원급제하였다. 그 후 홍문관수찬, 사헌부지평, 병조정랑, 공조참의,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876년(고종 13) 일본과 강화도조약 체결에 즈음하여 최익현의 상소 운동을 두둔하다 파직되었고, 1894년(고종 31) 사(邪)를 척결하고 정(正)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원을 복설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894년 동학(東學)과 일련의 개혁 정치를 모두 ‘사’로 인식하고 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위정척사 운동은 1895년(고종 32) 의병 운동으로 이어졌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안동에 전해지면서 의병을 일으킬 움직임이 일어났다. 안동에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첫 통문은 선성(현 예안면)에서 나왔는데, 1896년 1월 13일 이만응(李晩鷹)·금봉술(琴鳳述)·이만윤(李晩允)을 비롯한 223명의 이름으로 작성되었다.
이 통문을 바탕으로 이만도는 대장이 되고, 이중린(李中麟)을 부장 또는 중군으로 삼아 선성의진을 조직하였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만도는 이에 항거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의 내용은 을사오적을 참하고, 만국공법에 의지해서라도 조약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정척사 운동과 의병 항쟁을 벌이던 이만도는 1910년 일본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자 단식을 시작하였다. 이는 임금의 신하 된 자로서 적의 백성으로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철저한 의리론적(義理論的) 대응이었다.
처음 단식을 시작한 곳은 봉화 재산의 묘막이었으나, 동생 이만규(李晩煃), 아들 이중업, 종손 이강호(李綱鎬)의 간청으로 종가인 율리(栗里) 만화공(晩花公) 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본 경찰이 와서 강제로 미음을 떠먹이려 하자, “누가 감히 나를 회유하고 협박하느냐!”라면서 호통을 쳤다. 이만도는 1910년 10월 10일(음 9월 8일)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향산문집(響山文集)』·『청구일기(靑邱日記)』·『향산일기(響山日記)』를 남겼다.
[상훈과 추모]
순절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49년 영남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이만도 청구유허비(靑邱遺墟碑)가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 만화공 집터에 있다. 비문은 위당 정인보가 짓고, 백범 김구가 썼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