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47 |
---|---|
한자 | 義烈鬪爭 |
영어의미역 | Righteous Brotherhood Conflic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윤정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지역에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개인이나 소수 인력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
[개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진 의열투쟁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이었다. 안동 출신 인사들로는 김시현(金始顯)·김지섭(金祉燮)·권정필(權正弼)·김정현(金禎顯, 김시현의 동생)·류병하(柳秉夏)·류시태(柳時泰) 등이 참여하였다.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는 1919년 결성된 의열단(義烈團)으로,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에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미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면서 이에 대한 반성으로 급진적 투쟁인 암살과 파괴 활동을 펼쳤다. 그 대표는 밀양 출신 김원봉이었고, 이념을 체계화한 인물은 신채호였다.
[경과]
의열단에 참가한 안동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이 김지섭과 김시현이다. 김시현과 김지섭은 1922년 7월 서울에 들어와 권정필·김정현·류병하·류시태와 함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923년 3월 황옥과 함께 일제 통치 기관을 파괴할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폭탄을 국내로 들여왔다.
그러나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국내로 가장 많은 무기를 들여왔던 이 거사에서 폭탄은 미처 사용하지도 못한 채 계획이 노출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거사 직전에 김시현을 비롯한 단원 13명이 검거되었는데, 이때 김정현·류병하·류시태도 함께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일명 황옥사건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때 체포를 면한 권정필은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4년 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한편 상하이로 피신한 김지섭은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일본인들에게 참혹하게 학살당한 동포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1924년 1월 도쿄[東京] 일본 왕궁 앞에서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벌였다. 그는 1924년 1월 5일 왕궁 정문으로 접근하다가 경찰이 다가서자 폭탄을 던졌고, 급히 피하면서 왕궁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니주바시[二重橋]에서 다시 폭탄을 던졌다.
모두 세 개의 폭탄을 던졌으나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김지섭은 1925년 5월 사형을 선고 받았다가 1927년 20년으로 감형되었지만, 이듬해 감옥에서 의문스러운 죽음을 당하였다. 이는 이중교 의거로 불리기도 한다.
[의의와 평가]
의열투쟁은 피압박 민족의 자결권과 인권을 획득하기 위한 목숨을 건 의로운 투쟁이었다. 이들의 응징 대상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침략의 중심부인 일제의 주요 기관이나 핵심 인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의열투쟁은 테러와는 차별성을 가지는 식민지 해방 투쟁이었다. 특히 이중교 의거로 불리는 거사는 일본 왕을 처단 대상으로 삼은 첫 투쟁이었다. 이 같은 김지섭의 의열투쟁은 8년 뒤 이봉창 의거가 일어나는 뿌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