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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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山里 戰鬪와 間島 慘變 |
영어의미역 | Battle at Cheongsanri and Disastrous Accident of Gando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윤정 |
[정의]
1920년대 중국 지린성 청산리 일대에서 많은 안동 출신 인물들이 참여하여 전개한 독립운동과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가 간도 지역에서 저지른 한인 학살 사건.
[역사적 배경]
1920년 6월 북간도의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에 크게 패한 일제는 보복의 일환으로 서북간도 지역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항일전을 펼치고 있던 독립군을 소멸시키기 위해 ‘간도지방불령선인 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 剿討計劃)’을 세웠다.
[목적]
청산리 전투는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였으며, 간도참변은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한인 사회를 초토화하기 위해 벌인 사건이었다.
[발단]
간도지방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운 일제는 만주의 마적단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훈춘현(渾春縣)에 있는 일제 영사관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이 습격을 구실로 간도 지역에 대병력을 침입시킬 계략이었기 때문에 습격한 무리들을 한국인 독립군과 중국군·러시아인이 혼합되어 있는 단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날 즉시 조선군 제19사단을 중심으로 한 병력을 간도 지방에 투입하였다.
또한 계속하여 서북간도 지역을 가운데에 두고 마치 포위하듯 대병력을 동서남북 사방으로 침입시켰다. 일본군의 습격을 감지한 독립군은 러시아 연해주로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근거지를 출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이 청산리 전투이다.
[경과]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여 일간 서북간도의 독립군은 간도에 침입한 일본군 2만여 명을 맞아 백운평·완루구·어랑촌·천수평·쉬구·천보산·고동하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결과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군은 약 1,200명이 전사하고 200명이 부상을 입은 반면, 독립군은 수명의 사망자와 5명의 부상자만 발생하였다. 안동 출신으로는 북로군정서의 강인수를 비롯하여 김성로·김태규와 서로군정서의 김동삼·김중한 등이 참여하였다. 안동 출신 김동삼 등이 이끄는 서로군정서는 서간도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뒤늦게 도착했지만, 이들의 참전은 독립군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청산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서북간도 한인 사회에 철저한 보복을 가했다. 한인 마을에 침입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간도참변으로 불리는 일본군의 만행은 1921년 4월까지 계속되었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한인 3,700여 명이 피살되었다고 한다. 안동 출신의 김동만과 권기일도 이 무렵 목숨을 잃었다.
[결과]
약 6개월 동안 계속된 만행 끝에 일본군은 일부 잔여 부대만 남기고 1921년 4월부터 주력 부대를 철수시켰다. 이 참변으로 인하여 만주 한인 사회는 거의 궤멸 상태에 빠졌으며, 독립군은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청산리 전투는 항일 독립전쟁 사상 가장 빛나는 승전으로 한민족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에 대한 확신을 고양시켜 주었다. 그로 인해 간도참변이라는 처참한 일을 겪었는데도 독립운동의 열기는 식지 않았으며, 1920년대에도 꾸준히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