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6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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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書院 |
영어음역 | Seowon |
영어의미역 | Private Confucian Academy |
이칭/별칭 | 원사(院祠),사묘(祠廟),원우(院宇)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진영 |
[정의]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선현 제향과 교육을 위해 설치된 조선시대 사립교육 기관.
[건립 배경]
숭유 정책을 국시로 내세운 조선왕조는 성균관과 향교 등을 설립하여 유학을 적극적으로 보급하였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이러한 관학은 점차 쇠퇴하여 교육의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관학의 부진은 다른 한편으로 사학의 발달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관학 쇠퇴의 주요인이 교사의 무자격에 있었다면, 사학은 학덕을 겸비한 유력 인사의 힘으로 개설되었으므로 관학의 결점을 보완하여 번창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사학의 대표적인 기관은 서원이다. 사화 등 집권 세력의 탄압은 뜻있는 선비들로 하여금 산림에 숨어 정사(精舍)나 서당(書堂) 등을 열어 후진 양성에 힘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원에서 학문을 닦는 이들은 출세 위주의 사장학(詞章學)보다는 우주의 본질과 이성의 탐구라는 내적 학문 연마에 주력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 이들은 사림파라는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여 집권 훈구 세력과 대립하면서 여러 희생을 치른 끝에 정권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서원의 성립은 이러한 정치적·사회적인 여러 변화와 사림 세력 성장의 결과로 나타난 시대적 산물이었다.
최초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주세붕은 풍기군수로 부임하자마자 서원 건립에 착수하였는데, 서원 건립의 동기로 교화를 내세웠으며, 교화는 반드시 존현(尊賢)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풍기의 교화를 위해서 이 지역 출신인 안향(安珦)을 존봉하는 사묘(祠廟)와 유생 장수를 위한 서원(書院)이 필요하다며 풍기 향촌 사족의 협조를 받아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였다.
[퇴계의 서원 창설 운동]
1. 배경
조선에서 서원 제도는 주세붕의 백운동서원 설립으로 출현하였지만 이후 서원을 조선 사회에 보급·정착시키고 그 성격을 규정하여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퇴계 이황(李滉)이었다. 당시 퇴계는 조광조(趙光祖)와 그의 도학(道學) 정치에 공감하고 있었으며, 또 도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퇴계는 조광조 등의 선배 사류들과는 다르게 군주보다는 재지 사림의 역할과 교육에 더욱 많은 관심을 두었다. 이황은 향촌의 사자에게 주자학적 정치 이념과 학문 체제를 훈도하고 수련시킴으로써 앞으로 향촌 사회와 국정을 주도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학 체제의 확립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퇴계가 살던 시대는 훈구파의 전횡에 대한 사림파의 도전이 치열하던 시기였다. 퇴계는 19세와 45세에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몸소 경험하였으며, 특히 조광조의 이상주의적 도학 정치가 좌절되어 버린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퇴계는 이러한 사화의 원인을 군주 주위에 있는 무리들의 인심(人心)이 바르지 못한 때문이라고 보았다. 온갖 부정을 도모하는 무리들이 군주를 악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파악한 것이다.
또한 퇴계는 인심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참다운 성리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보고, 참다운 성리학 공부는 과거나 출세만을 위주로 하는 향교나 성균관 등 관학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파악하였다. 그래서 복잡함을 피하여 조용한 곳에서 출세주의와 공리주의를 떠나 순수한 학문과 수양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서원을 주목하게 되었다.
2. 사림과 서원
이황의 서원 창설 운동은 서원이 독자성을 갖고 정착하게 된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퇴계는 교화의 대상과 주체를 일반 백성과 사림으로 나누었다. 그러면서 실효를 거두기 위해 우선 도학을 천명하고 이를 밝혀야 한다고 하였다. 퇴계는 이를 담당할 주체를 사림으로 보고 이들의 습속을 바로잡아 학문의 방향을 올바르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서원의 독자적 역할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백운동서원은 설립된 지 6년 후인 1549년(명종 4) 퇴계가 사액을 청원하여 명종이 소수서원이란 편액을 내림으로써 사액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퇴계는 중국의 예를 들어 사액과 동시에 국가적 차원의 경제적인 후원 및 감사·수령 등 지방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지방관의 지원은 경제적인 것에만 한정하고 그 밖의 서원 운영은 사림이 자치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강조하였다.
[운영]
1. 원임
서원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주체는 원임(院任)과 원생(院生)이다. 원임에는 원장(院長)과 유사(有司) 체제를 기본으로 한다. 원장은 대외적으로 서원을 실질적으로 대표하고 서원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가벼이 교체해서는 안 되며, 모든 원유(院儒)들이 존경하고 경외해야 할 인물이다. 원장의 임기는 보통 1~2년이었다.
영남 지방의 원장은 향중에서 학덕과 명망을 갖춘 생원·진사·참봉 등의 하급 관료와 유학 등에서 선출하였지만, 유학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반면에 기호 지방 노론계 서원의 경우에는 중앙의 고위 관료들이 원장을 담당하였고, 장의를 두어 향중의 인물로 하여금 실질적으로 운영하게 하였다. 원장의 선출은 서원의 유림에 의해 자율적으로 선출되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관이 여러 원장을 역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16세기에는 피봉자의 후손이 원장에 선출되는 것을 되도록 기피하였으나 17세기 중반부터는 점차 후손의 원장 선출이 확산되었고, 하대로 내려오면서 비율은 더욱 높아졌다. 유사는 서원의 대소사를 직접 운영해 나가는 담당자였다. 유생의 접대와 재정 문제, 문서 검열 등이 주요 임무였다. 또 특별한 사안이나 일에 따라 별유사가 선출되기도 하였다.
2. 유생
원생은 흔히 유생(儒生)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대부분 생원과 진사 합격자나 양반 유생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사회적·경제적 변화에 따른 중서층(中庶層)들의 경제적 성장과 중앙 정부의 서얼 허통 조치의 분위기 속에서 점차 이들도 전통적인 양반들의 명부였던 「입원록(入院錄)」과 「원임록(院任錄)」에 입록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귀천(勿論貴賤)을 표방하여 좀 더 개방적이었던 서인계 서원과는 달리 영남에서는 이들이 비록 대소과에 합격하였다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생으로 등록된 유생들의 거주지는 서원에 따라 달랐지만, 그 지역 출신만이 아니라 인근의 여러 행정 구역에 분포되었다.
[기능]
1. 제향의 기능
서원 건립은 일차적으로 강학(講學)이 목적이었지만 제향(祭享)의 기능도 있었다. 따라서 서원이 건립되기 위해서는 배향할 만한 인물이 있어야 한다. 배향인은 17세기 중반 이후 서원이 무분별하게 세워지면서 학문이 깊다고 보기 어려운 인물, 유화(儒化)를 남긴 수령, 행의(行誼)가 있는 사자(士子)로까지 확대되었지만 원래는 반드시 학문이 깊고 사문(斯文)에 공로가 있는 자라야만 가능하였다.
따라서 사림의 종사로서 추앙할 수 있는 유현(儒賢)을 배출하지 못한 고을의 경우, 이들의 적거(謫居), 졸지(卒地), 장리지소(杖履之所), 외향(外鄕), 처향(妻鄕), 본향(本鄕) 등의 연고를 내세워 서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서원이 당시 사림들의 강학소 내지 향촌의 사회적·경제적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으로 자리 잡으면서, 서원을 갖지 못한 고을의 경우 사림의 활동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 강학의 기능
서원에서 담당한 교육의 내용은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었다. 관학과 달리 서원 교육은 사학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이 존중되었다. 교재의 범위와 학습의 순서는 보통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춘추』의 차례에 따라 진행되었다.
교육 방법은 원규(院規)에 의한 규제와 원생 자신의 자율적인 실천 및 학습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교수 방법으로는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의리를 문답하는 강(講)이 기본이었다. 평가는 대통(大通), 통(通), 약통(略通), 조통(粗通), 불통(不通)의 5단계로 나누었고, 오늘날과 마찬가지의 출석부나 생활기록부 등이 작성되기도 하였다. 서원은 또한 향촌 사회의 도서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폐단]
1. 교육 기능의 약화
서원에서 제향 기능은 교육 기능 못지않게 중시되었다. 봄과 가을에 실시되는 향사(享祀)는 서원에서 모시고 있는 선현의 학덕과 행실을 모범으로 한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는 행사였다. 서원에 배향하는 인물은 향촌 사회를 교화하기 위해 학덕이 뛰어나거나 충절과 의리로서 모법이 될 만한 그 고을이 출신이거나 관련을 가진 인물들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점차 당쟁이 격렬해지면서 학덕과 행실이 아니라 정치적인 입장에서 자파의 인물을 서원에 배향하고자 하였다. 또 문벌과 학벌이 강조되면서 각 문중의 권위와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각 가문의 후손이나 문중에서 다투어 서원을 건립하였다. 이전의 서원이 향촌의 공론(公論)에 의해 설립되었던 것과는 달리 문중을 단위로 하여 건립된 서원을 흔히 ‘문중서원’이라 하였다. 자기 가문의 이름난 인물을 서원에 배향하는 것이 가문의 권위를 드러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서원은 교육의 기능이 약화되고 정치적·사회적 역할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2. 무분별한 서원 건립에 따른 국가 재정의 부담
서원에는 많은 토지와 노비가 소속되어 국가 재정에도 큰 부담을 주게 되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서원의 무분별한 건립을 막고자 같은 사람을 배향한 서원이 여러 곳에 있는 경우 훼철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1741년(영조 17)에는 전국적으로 173개소에 이르는 서원과 사우가 훼철되었으나, 성공적이지 못하여 계속해서 늘어만 가서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전면적인 원사 훼철을 맞이하게 되었다.
3.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원은 당시 유림들의 유일한 근거지였던 까닭에 유림에게는 서원 훼철이 그들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의 해체, 나아가 생존의 문제로 인식되었던 만큼 반대 또한 격렬하여 만인소(萬人疏)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이 같은 반대를 무릅쓰고 마침내 전국적으로 47개의 서원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훼철을 단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 당시 경상도 지역에는 사액되지 않은 서원과 향현사 등을 포함하여 약 600여 개가 넘는 서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훼철된 것으로 보고된 서원과 사우는 모두 505개소였다.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안동의 서원]
안동(예안 포함)에는 전국의 그 어느 지역보다도 많은 서원이 있다. 그것은 안동에 명문 양반 가문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원 창설 운동을 전개했던 퇴계 이황이 역동서원(易東書院)의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퇴계를 모시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영남에서뿐만 아니라 전국 서원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안동의 서원 역시 여느 서원과 사정과 마찬가지여서 지방 사림들의 공론을 바탕으로 하고 관의 지원과 협조를 통해 건립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점차 사림의 공론보다는 문중이 중심이 되어 문중의 선조를 배향·봉사하는 이른바 문중서원이 주로 건립되었다. 이들 서원의 건립에는 인근 농민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1930년대에 편찬된 『교남지(嶠南誌)』「서원조」에 등재되어 있는 안동과 예안의 서원 수는 모두 48개이다. 이 가운데 사액서원은 안동에 6개소, 예안에 2개소가 있고, 미사액 서원은 안동에 34개소, 예안에 6개소가 있다. 이 서원 가운데 예안의 도산서원과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제외하고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모두 훼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