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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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鵲山精舍-可倉齋舍 |
영어공식명칭 | Jaksanjeongsa and Gachangjaesa |
영어음역 | Jaksanjeongsa Mit Gachangjaesa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 89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윤천근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0년 12월 30일 - 작산정사및가창재사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21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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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작산정사및가창재사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재지정 |
성격 | 재사|정사 |
건립시기/일시 | 1480년 |
정면칸수 | 5칸 |
측면칸수 | 5칸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 89 |
소유자 | 진성이씨 문중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에 있는 조선 전기 진성이씨 가문의 재사 및 정사.
[개설]
작산정사는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修)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손의 학문 연구를 위하여 1480년(성종 11)에 이황(李滉)의 조부 3형제가 창건하였으며, 가창재사는 이정(李楨)의 유덕을 추모하는 곳으로 1480년 작산정사와 함께 건립하였다. 가창(可倉)은 작산(鵲山)의 옛 이름이다.
[위치]
작산정사및가창재사는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 89번지에 있다. 이천동에서 옹천을 향해 가다 국도에서 오른편 샛길로 들어서면, 구불구불 돌아가는 작은 길이 나온다. 길을 따라 들어가면 골짜기 안쪽으로 작은 저수지가 나오는데, 작산정사및가창재사는 이 저수지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저수지 위에 펼쳐진 분지의 동쪽으로는 작산 구강당과 주사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서쪽으로는 작산정사와 사당을 거쳐 가창재사로 오르는 길이 있다.
[변천]
「가창재사 창건과 중수 사적」에 의하면 가창재사는 선산부사 이정의 분암이다. 1480년(성종 11) 이정의 장자인 전 인동현감 이우양(李愚陽), 차자인 훈련원 참군 이흥양(李興陽), 차자인 진사 이계양(李繼陽)이 창건하였다. 봄에 역사를 시작하여 가을에 끝마쳤으니, 일 년이 걸린 공사였다. 1561(명종 16) 봄, 사현손(嗣玄孫)인 훈도 이연(李演), 증손인 전 찰방 이징(李澄), 공조참판 이황(李滉), 현손인 진사 이재(李宰), 5세손인 이희안(李希顔)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1656년(효종 7) 8세 사손(嗣孫) 이증효(李曾孝)가 중수하였는데, 이 때 간사는 7세손 이극준(李克遵), 도관은 8세손 생원 이조영이 담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715년(숙종 41)에도 중수를 하여 규모를 조금 키우고, 앞쪽을 옆으로 7량으로 하고, 누각을 새로 얽었다.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 7월에 끝마쳤다. 총 간사는 10세손 이흥진(李興眞), 8세손 이성익(李成翼)이 담당하였고, 도장과 기와 일을 감독한 사람은 9세손 이후재(李厚栽), 10세손 이시진(李始眞), 중요 공사를 분정한 사람은 9세손 이달현(李達玄), 10세손 이장겸(李長兼, 겸은 앞에 향자를 붙임)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8세손 진사 이조명(李朝鳴)의 기사가 있다.
1777년(정조 1)에도 중수를 했다. 총 간사와 제사 일을 주관한 사람은 13세손 이국량(李國樑), 간사는 10세손 이세원(李世元), 11세손 이효채(李孝彩)이고, 11세손 이효석(李孝錫)의 기사가 있다. 1862년(철종 13) 봄, 14세 사손 이우주(李宇周)가 동서의 날개를 이룬 재사 건물과 누각을 중수하였는데, 1863년 가을에 공사를 끝마쳤다. 간사는 후손 이인숙(李寅夙), 이만백(李晩白), 이동역(李?役), 이인극(李寅克), 이약수(李若水), 이진룡(李震龍)으로, 후손 이국교(李國僑)의 기사가 있다. (이상은 「봉선록(奉先錄)」 중에서 가려 뽑은 것이다.) 1879년(고종 16)에는 17세 사손 이긍연(李兢淵)이 중수하였는데, 간사는 후손 이형근(李亨根), 이의룡(李宜龍), 이의동(李宜東), 이재영(李在榮)이다.
단기 4215년 병자년 2월 하순, 후손 이수걸(李秀杰)이 쓴 현판 속에 이상의 기록이 보인다. 이 현판 글씨는 단기 4215년, 즉 1882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송안군 이자수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재사의 이름조차도 ‘선산부사 이공 분암’이다. 따라서 작산 구강당과 주사는 이우양, 이흥양, 이계양 등 3형제가 부친인 선산부사 이정의 묘사를 위하여 건립하였고, 특히 강당은 묘사에 들었을 때 일족의 젊은이들도 여기 모아 교육하고자 하는 목표를 지니는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터이다. 안동시청에서는 1988년과 1994년에 작산정사및가창재사를 보수하고 경역을 정화하였다.
[형태]
재사 영역은 경사면을 단층면으로 이용하여 좌우로, 또 상하로 나뉘어져 있다. 좌우로 이 영역은 3분된다. 동쪽 편으로는 강당이 있고, 서쪽 편으로는 정사가 있으며, 중앙에는 재사가 있는 것이다. 상하로 이 영역은 2분된다. 아래쪽으로는 강당과 정사가 양편으로 자리 잡고, 위로는 재사가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다. 구성은 후학들의 학문 연구를 위한 강당과 시제 및 묘사를 준비하는 주사로 이분된다.
1. 주사
주사는 아주 약한 기울기를 갖는 지표면을 그대로 이용하여 세워졌다. 앞은 3단의 석축을 쌓아 올려 세웠고, 옆은 3단에서 2단, 2단에서 일단으로 석축의 층수가 달라지는 길쭉한 삼각형의 석축면으로 처리하여 그 위에 대지를 마련하였다.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이다. 벽은 황토 흙과 세월의 빛깔이 스며든 나무판으로 되어 있다.
전면의 동쪽으로 3칸은 아래 3분의 2정도를 나무판을 세워 붙이고, 그 위는 흙벽으로 처리를 하였다. 그 중 세 번째 칸의 나무판 벽 서쪽 끝에는 그 나무판 벽과 같은 키를 가진 나무판 문이 마련되어 있다. 이 세 칸은 바깥벽의 모습만으로도 그 용도가 헛간, 또는 창고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주사는 규모가 큰 ‘口’자 건물이다. 안의 ‘口’자 마당은 비좁아 보일 정도이지만, 전면, 측면 각 5칸씩의 건물이므로 밖의 ‘口’자 모양 집채는 큰 규모일 수밖에 없다.
전면의 지붕은 옆으로 쭉 뻗은 전면의 건물 기왓골 위로 양편 끝에 납작한 팔작지붕이 올라붙어 있는 형상이다. 측면에서 보면 뒤편 건물의 팔작지붕 하나만이 옆면 건물 지붕 끝에 올라붙어 있는 모습이다. 주사 서쪽 측면의 벽은 전면의 벽을 처리했던 것과는 다른 미학의 적용을 받고 있다. 전면의 벽은 불균형의 미학이 적용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좌우의 대칭도, 상하의 균형도 고려되어 있지 않다. 이 불균형의 미학은 서쪽 벽면의 처리 방식에도 일정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서쪽 벽면에서는 불균형의 요소는 약하고 균형의 요소는 강화되어 있다. 서쪽 벽면 맨 위편 칸은 위아래에 넓게 벌려 횡목을 가로지르고, 그 사이 벽의 아래편 기둥에 붙여서 격자무늬 방문을 달았다.
서쪽 벽면의 중앙 3칸에서는 균형과 대칭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으나, 아래위의 한 칸에서는 그 균형과 대칭이 조금 무너진다. 두 칸 다 벽면을 가로로 3분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으나 횡단의 높이와 넓이, 문의 크기와 문을 달아맨 지점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이 사소한 어긋남은 무신경함의 소산같이 여겨지기도 하나, 묘하게 벽면 전체에 생동하는 화음을 제공한다. 사실은 정밀하게 계산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사 동쪽 벽면에 이르면 균형은 사라지고 불균형의 미학이 국면을 지배한다. 동쪽은 바닥 자체를 3단으로 조금씩 층지게 만들어, 아래 두 칸은 맨 아래 기단 위에, 그 위의 두 칸은 중간 높이의 기단 위에, 맨 위의 한 칸은 제일 높은 기단 위에 배치하였다. 이것 자체가 불균형의 미학을 적극적으로 조장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제일 아래 칸은 3단으로 횡단하고, 아래쪽 1단은 넓은 판재를 세워 붙였다.
두 번째 칸은 중앙에 횡목을 두어 둘로 벽면을 나누고, 아래쪽은 판자벽 사이에 두 쪽 판자문을 달았다. 위의 3칸은 가운데 두 개의 횡목을 벌려서 가로지르게 하여 벽면을 3등 분할하였는데, 그 횡단의 높낮이와 분할된 벽면의 넓이는 서로 다르다. 또 각 칸의 분할된 중앙 벽면에는 각각 다른 모양의 창문을 조금씩 다른 벽면 위치에 가설하였다. 주사 뒤쪽의 벽면은 중앙 3칸이 나무판 문이고, 그 좌우 칸은 동일한 모양의 벽면이다. 주사의 동쪽 면은 기울기가 주사 쪽보다는 심한 곳이다.
2. 강당
강당은 그 기울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우선 아래쪽 길에서 주사 쪽으로 나아가는 사이에 높은 언덕이 위로 붙어 있고, 강당은 그 위에 높다랗게 올라앉아 있다. 주사의 서편 벽 쪽으로 길을 따라 오르면 높은 언덕 위를 밀고 들어선 좁직한 마당이다. 강당은 마당 북쪽 부분에 높은 단을 쌓고 그 위에 또 올라앉아 있다. 기슭면의 급한 기울기를 잡아야 하였으므로, 강당을 앉힌 대좌의 석축은 자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단 앞쪽의 석축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제1단은 3단 또는 4단의 석축을 쌓았고, 중앙에는 하나의 넓은 섬돌을 두었다.
기단의 위쪽은 폭이 좁은 뜨락이다. 뜨락 안으로 조금 들여서 이번에는 4단 또는 5단의 석축을 쌓아 제2단을 만들었다. 제2단은 제1단보다 2배는 더 높다. 제1단의 섬돌이 있던 자리 위쪽으로는 3개의 계단을 만들어 제2단 위 뜨락으로 오르는 길을 만들었다. 제2단의 높은 석축 면 중 강당의 양쪽 끝 칸 중앙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칼로 잘라내듯 기단 면이 차단되어 안쪽으로 들어가서 아궁이와 연결된다. 2단의 기단 면을 형성하고 있는 돌들은 크기가 각각 다른 돌들이다.
큰 돌과 작은 돌이 뒤섞여 있으므로 석축의 면은 층수가 각각 다르다. 자연석 바위를 표면만 조금 다듬어 서로 빈틈없이 짜 맞춰 석축을 만든 것이다. 앞마당에서 보았을 때, 석축은 높이 올라서 있고, 그 위에 강당이 높다랗게 자리 잡고 있다. 자연스럽게 위엄을 강조하는 미학이라고 하겠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평지에 석단을 올려 세운 것이 아니라 경사면에 그 기울기를 극복하기 위한 석단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석단의 높이가 위압감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엄을 강조한다는 것은, 이유야 어떠하든 강당이 자리 잡은 지점이 조금 오뚝한 언덕 위이고, 또 그 위의 오뚝한 석단 위에 강당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일종의 장중한 느낌을 가져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완벽하게 대칭이 고려된 구조이다. 벽면은 모두 백회를 칠하였다. 기둥과 마루, 서까래와 방문 등의 목재를 재외하고는 백회의 벽면인 것이다. 정면 5칸 중 가운데 3칸은 마루이다. 마루 앞부분의 양쪽 끝은 양쪽 방의 한 모서리를 이루는 각재의 기둥이고, 중앙에 벌려 세운 두 기둥은 배가 부른 원형의 기둥이다. 기둥의 초석은 조금은 단단해 보이는 사암을 다듬어서 썼다. 상당이 넓고 큰 초석이다.
마루의 횡면 각재는 기둥 사이에 끼워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마루는 들보와 횡보, 서까래로 이루어진 목구조가 수선, 횡선, 사선으로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환상적이다. 그 목구조 위쪽 삼각형 면에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동쪽 방의 벽면 쪽으로 걸려 있는 것은 ‘비해재(匪懈齋)’, 즉 ‘게으름을 없애는 집’이라는 뜻이다. 서쪽 방의 벽면 쪽으로 걸려 있는 것은 ‘무첨재(無?齋), ‘더럽힘을 없게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마루 앞 쪽 배흘림기둥 사이에는 뜨락 위에 넓은 섬돌이 하나 놓여 있다. 앞의 마당에서 볼 때, 마당 위의 섬돌까지는 뜨락 면까지를 포함해서 7단의 계단이 놓여 있는 셈이다. 마루 뒤쪽 벽면은 3칸이 똑같이 처리되어 있다. 아래쪽 3분의 2까지는 나무판과 두 쪽 나무판문으로 되어 있고, 위쪽 3분의 1 부분은 백회로 바른 벽이다. 위쪽의 처마 밑으로는 두 횡목이 좁은 틈을 두고 배치되고, 그 사이를 각 세 개 씩의 역사다리꼴 나무 부재를 끼워 처리하였다.
양쪽의 방은 각각, 정면 1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통방이다. 방의 마루 쪽 벽면은 두 칸이 조금 층지는 높이에서 횡목으로 각각 분할되어 있다. 아래쪽 칸은 중간쯤에서 분할되어, 아래편에 키가 작은 두 쪽 방문을 달았다. 위쪽 칸은 3분의 2쯤 되는 높이에서 분할되어, 키가 조금 큰 외쪽 방문을 달았다. 강당의 뒤울은 밋밋한 기울기를 이루며 위로 오르다가 곧 높은 둔덕으로 이어진다.
3. 작산정사및가창재사
강당과 주사는 재사 영역의 동쪽 날개 쪽에 자리잡고 있다. 서쪽 날개 쪽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작산정사와 사당 건물이다. 작산정사와 송안군 묘 앞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서쪽 건물들은 경사면을 이용하여 위 아래로 늘어서 있다. 작산정사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이다. 2단의 석축을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건물을 앉혔다. 이 좁직한 분지 속 세상의 몸체 역할을 하는 것은 가창재사이다.
가창재사는 동쪽으로 구강당 영역, 서쪽으로 작산정사 영역을 날개로 하여 그 중앙에 위쪽으로 올라서 있다. 가창재사는 커다란 바위면을 석단으로 하여 그 위에 마련된 기단 위에 자리잡고 있다. 아래쪽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바위 위에 높다랗게 올라서 있는 목재의 성채와도 같다. 바위 평지에는 다시 화강석 석단을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건물은 그 위에 자리잡았다. 정면 6칸, 측면 6칸 규모이다. 정면에는 2층의 누각을 두었다. 누각 1층은 대문 영역을 제외하고는 회벽 처리가 되어 있다. 회벽의 위쪽 부분은 기와를 사선으로 넣었다. 전면 서쪽으로부터 3번째 칸은 대문이다. 동쪽 끝 칸의 아래쪽으로는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다.
대문간은 완전히 나무로 채워져 있다. 양쪽으로 폭 좁은 나무판을 두고, 아래에는 중앙 부분이 아래쪽으로 휘어지는 문지방을 대었다. 누각 2층은 동쪽 1칸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무판 벽과 나무판 문으로 되어 있다. 대문 위 2층 누각의 처마 밑에는 ‘화수루(華樹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화수루의 밑에 마련된 정문을 통해 들어가면, 2단의 낮은 석단 위에 사각의 안마당이 펼쳐져 있고, 그 뒤편으로 4단의 석축 위에 위쪽 건물이 올라앉아 있다.
가창재사의 위쪽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서쪽 1칸은 서쪽 건물의 벽 속으로 들어가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은 정면 4칸이다. 이 네 칸의 안마당 쪽 벽은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으나 조금씩 모습이 다르다. 똑같이 두 쪽의 격자무늬 방문을 달고 문 허리 양쪽 벽을 횡목으로 가르고 있으며, 문의 위쪽에 문틀 겸 횡목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은 같다.
그러나 문의 크기는 다 조금씩 차이가 나고, 따라서 허리 횡목은 다 같은 높이이지만 위편 문틀 횡목은 높이가 다 달라지는 것이다. 이 4칸의 앞쪽으로는 반 칸 규모의 마루이다. 이 네 칸의 서쪽 제1칸 처마 밑에는 ‘가창재사(可倉齋舍)’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의 동쪽 옆구리 부분은 부엌이다. 3개의 아궁이가 서쪽을 향하여 자리잡고 있고, 서북쪽 모서리 부분에는 따로 간이 아궁이가 또 마련되어 있다.
가창재사의 동쪽 건물은 부엌 영역 아래쪽으로 2칸이 늘어서 있으며, 그 중 두 번째 칸의 안마당 쪽 벽에는 폭 좁은 계단이 붙어 있어 누마루에 이르는 길로 쓰인다. 동쪽 건물의 나머지 부분은 누마루의 동쪽 면으로 기능한다. 가창재사의 서쪽 건물은 위 두 칸은 위쪽 건물의 일부가 되고, 그 아래로 2칸의 방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 아래쪽 부분은 누마루로 이어진다. 2칸의 방 부분은 각 칸마다 작은 두 쪽문이 붙어 있다.
가창재사의 누마루는 동쪽 1칸은 동쪽 건물의 벽 속으로 들어가 있으므로 나머지 5칸을 정면으로 하여 측면 1칸 반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안마당 쪽으로 마루가 나가서 그 끝에 난간을 세워 두었으므로, 전체 측면 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난간은 서쪽 건물의 방 안쪽을 타고 나가 위 건물의 뜨락까지 이어진다. 누마루의 한 끝이 위쪽 건물 뜨락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현황]
1980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2011년 현재 진성이씨 문중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진성이씨는 시조 이석의 아들인 송안군 이자수에 의해 사족으로서의 기반이 다져졌다. 안동의 진성이씨는 이자수의 두 아들인 이운구, 이운후 중 차자인 이운후 계열이다. 이들은 안동을 중심으로 하여 진성이씨의 대종가 계열을 이어나갔다. 세칭 두루종가로 불리는 이 계열은 선산부사를 지낸 이정에 의해 대표된다. 이정의 세 아들이 진성이씨 일족의 영광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작산재사 영역은 송안군 이자수, 선산부사 이정의 묘당과 묘사가 같이 위치함으로써, 안동 지역 진성이씨 일족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