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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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固城李氏 |
영어의미역 | Goseong Yi Clan |
이칭/별칭 | 철성이씨(鐵城李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집필자 | 김복영 |
[정의]
이황을 시조로 하고 이증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세거 성씨.
[개설]
안동에 살고 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는 입향조 이증을 파조로 하는 참판공파(參判公派)의 일부로 안동시 정상동과 법흥동 일원에 세거하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안동의 대표적 명문 사족중 하나이다.
[연원]
중국 한나라 무제 때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눌러 살게 된 이반(李槃)의 24세손 이황(李璜)이 고려 덕종 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부사를 거쳐 1033년 거란이 침입했을 때 세운 공으로 이부상서에 올라 철령군(鐵嶺君: 철령은 철성(鐵城), 곧 현 고성의 별호)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이황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고성(또는 철성)으로 쓴다.
[입향경위]
고성이씨가 안동에 정착하게 된 것은 145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영산현감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된 이증(李增)이 벼슬을 그만둔 후 안동 산수의 아름다움에 반해 안동부 부성 남문밖에 우거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현황]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1368~1429)의 여섯째 아들인 이증은 아들 6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이굉(李浤, 1441~1516)이 문과에 급제한 것을 비롯하여 6형제 모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평택현감을 지낸 장자 이평(李泙)의 아들 5형제는 맏아들 이윤(李胤), 둘째 이주(李冑), 다섯째 이려(李膂)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셋째 이전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출사하고 넷째 이육도 안기도찰방에 나가는 등 크게 영달하였다.
그러나 무오사화에 이윤이 화를 입고 갑자사화 때 이주가 사사되니 남은 자손과 형제들이 영천, 군위, 청도, 합천 등지로 이거하고 현재 안동에 거주하는 고성이씨는 이증의 아들 중 개성유수를 지내고 고향에 돌아와 귀래정(歸來亭)을 지은 이굉(李浤)과 형조정랑을 지내고 임청각(臨淸閣)을 지은 이명(李洺) 형제 후손들의 일부이다.
이들도 인조반정 후 이괄(李适)의 난에 일족으로 연좌되어 오랫동안 출사의 길이 막혔다가 이명의 8세손 이후영(李後榮)이 숙종 때인 1684년 문과에 급제하여 고성군수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9세손 이시항(李時沆), 12세손 이주정(李周楨)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고 생원 진사도 17명을 배출하였으며 그 밖에 학행으로 유명한 이도 많다.
이후영의 현손 이종학(李宗岳, 1726~1773)은 과거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예술로 인생을 달관한 강호처사였는데 시 180여 편을 포함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유작 중에 특히 1763년에 그린 『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遺帖)』 12폭 화첩은 한국회화사의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임청각에서 도연에 이르는 반변천(半邊川) 주변의 12경승을 선유하면서 그린 실경 산수화로 지금은 임하댐 물속에 잠긴 반변천 주변의 250여 년 전 풍광을 알 수 있는 역사 자료이기도 하다.
근세 격동기를 거치면서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과 동구(東邱) 이준형(李濬衡) 부자를 비롯하여 10여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
[관련유적]
이굉이 건립한 귀래정(안동시 정상동 소재), 이명이 건립한 임청각과 군자정(안동시 법흥동 소재), 이명의 여섯째 아들 이굉(李肱)이 건립한 반구정(伴鷗亭, 안동시 정상동 소재), 반구정 이굉의 증손 이적이 건립한 탑동파 종택(안동시 법흥동 소재), 이적의 7세손 이종주가 지은 북정(北亭, 안동시 법흥동 소재), 입향조 이증의 아버지 이원과 갑자사화 때 사사된 이주를 제향하는 명호서원(明湖書院, 안동시 정상동 소재)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