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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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熙周 |
영어음역 | Gim Huiju |
이칭/별칭 | 공목(公穆),성사(聖思),갈천(葛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민석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공목(公穆), 성사(聖思, 왕명에 의해 고침), 호는 갈천(葛川). 아버지는 김시동(金始東),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로 박효술(朴孝述)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희주는 처음에는 전필현(全必鉉)과 권사민(權思敏)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후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1789년(정조 13) 사마시를 거쳐, 1795년 단풍정친시(丹楓亭親試)에 합격한 뒤 성균관전적으로부터 병조좌랑, 병조정랑, 예조좌랑, 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이어서 영해부사, 안주목사, 우승지, 형조참판, 한성좌윤, 사간원대사간, 함길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798년 홍문관교리 때에는 시폐(時弊)를 상소하여 왕의 가납(嘉納)을 받았고, 1800년 교리에 실록편수관(實錄編修官)을 겸하여 『영조실록(英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만년에는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리산(智異山)을 비롯한 여러 명산들을 두루 둘러보았으며 바다를 건너가 한라산(漢拏山)에 올라 백록담(白鹿潭)을 감상하였다. 유람에서 돌아온 이듬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김희주는 평생 동안 공부에 있어 전제가 되는 것이 입지(立志)라는 신념을 견지하였다. 초학에 있어 용렬하고 못된 성품, 혼미하고 나태한 정신, 생각이 얕은 공부는 모두 기(氣)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기를 거느려 옳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을 세워야 할 ‘뜻’으로 보았으며 세도(世道)를 유지하고 사환(仕宦)에 나아가는 것도 그 의의가 여기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갈천집(葛川集)』 10권이 있다. 문집 중 권1~2의 시 가운데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는 김희주의 문학적 재주와 감성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서(書)는 주로 학우들과 친지들과 주고받은 것으로 이황(李滉)과 이상정의 학문에 관한 것이 있다. 소 중에 「논혜경궁복제소(論惠慶宮服制疏)」는 당시 예설(禮設)에 관한 소신을 밝힌 것으로 혜경궁의 상례(喪禮)에 있어 소홀한 처사를 지적하였다. 「경연강의(經筵講義)」는 왕도정치를 주장하여 맹자(孟子)의 사상을 실천해야 한다고 논술하고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영주시 어유곡(魚遊谷)에 있다.